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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박사 53년만에 특별귀화

관리자 2012-03-22 (목) 15:43 12년전 2588  

전라도서 태어난 미국인, 53년 만에 결국…

조선일보 원문 기사전송 2012-03-22 03:25 최종수정 2012-03-22 06:47

 

 

4代 117년 걸친 한국 사랑… 연세대 세브란스 인요한 소장 '특별귀화자' 국적 취득

 

금발에 벽안(碧眼)인 한 남자가 만세를 외치듯 두 팔로 태극기를 펼쳐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외국인이지만 그의 입에서는 연방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이제 진짜 한국사람이오. 무지하게 기쁜게 우리 함께 잘 살아봅시다잉!"

 

사방에서 웃음과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4대(代)가 117년 동안 변치 않는 '한국 사랑'을 이어온 미국인 집안에서 마침내 첫 '한국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연세대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53·미국명 존 린튼) 소장. 그는 21일 경기도 과천 법무부청사에서 한국 국적을 받았다. 좁은 골목도 다닐 수 있는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고, 대북 지원사업에 헌신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귀화자로 선정된 것이다.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국적을 허용한다"는 국적법에 따라 선대(先代)의 공로로 후손들이 특별귀화 허가를 받은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로로 특별귀화자가 된 것은 인 소장이 처음이다.

 

실제로 그의 가계(家系)는 선교·독립운동·교육·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 세기가 넘도록 한국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기록으로 가득하다. 첫 인연은 1895년 인 소장의 외증조부인 유진 벨(Bell·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한국 땅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벨 선교사는 '전남 지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다.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튼(Linton·한국명 인돈)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한남대학을 설립했다.

 

인 소장의 아버지 휴 린튼(한국명 인휴)은 말 그대로 이 땅에서 피를 흘리고 뼈를 묻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인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고, 1984년 농촌 선교 사업 도중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무덤은 전남 순천에 있다. 인 소장이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게 된 계기가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휴 린튼은 적정한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택시로 병원에 옮겨지던 중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인 소장은 "농촌의 좁은 길까지 올 수 있는 구급차만 있었어도 아버지는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1993년 미니버스를 개조해 좁은 길에서도 쉽게 달릴 수 있도록 설계된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다.

 

 

1996년 어머니 로이스 린튼(한국명 인애자) 역시 40년 동안 의료봉사의 공을 인정받아 호암상을 받은 뒤, 상금 5000만원을 아들에게 쥐여줬다. 그러면서 "구급차 하나를 북한에 기증해 달라"고 했다. 이듬해 인 소장은 선교활동을 하는 형 스티븐 린튼(한국명 인세반)이 운영하는 유진 벨 재단의 도움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형제는 북한에 결핵약품과 의료장비를 무상 지원하여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전개하는 등 봉사활동을 펼쳤다.

 

인 소장은 그동안 몇 번이나 귀화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가 반대했다. "어머니는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워낙 강해 내 귀화를 반대하셨어요. 너무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죠."

 

인 소장은 이번 특별귀화허가를 받으면서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을 통해 미국시민권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어머니를 안심시키면서 진짜 한국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나 계속 한국에서 자란 토종 한국인이라오. 항상 한국에 살면서도 10% 부족한 마음이었는데 이젠 특별귀화 제도 통해서 100% 한국 사람이 됐응게 아주 기뻐요. 나는 어차피 여기서 뼈를 묻을 거니까. 이제 마음이 더 편하니까 오늘부터 더 다리 쭉 뻗고 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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