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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료특별전시회(한영제장로기념) 자료소개

관리자 2014-06-30 (월) 15:57 9년전 2932  

증경총회장 향산 한영제 장로 기념 특별전시회 전시 자료 소개 

향산 한영제 장로 유품 

  ○ 성경

○ 총회장 명패

○ 십자가

○ 기독교대백과사전 표구

○ 지팡이

○ 신발

○ 총회 회의 진행 모습

○ 의사봉을 인수 받는 향산

○ 향산의 웃음

 

2. 전시물 목록 및 설명서

 1. 주한 미국공사 알렌 부부(1903년)

 한국 개신교 첫 번째 주재 선교사로 알려진 알렌(Horace N. Allen)은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어 활동하다가 미국 공사관 의사 자격으로 1884년 9월에 내한하여 정동에 정착했다. 같은 해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 당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아 서울 재동에 광혜원(후 제중원 및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함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었다.

이 사진은 1903년 서울 정동에 위치한 미국 공사관에서 부인 및 공사관 직원과 함께 촬영한 것이다. 오른 쪽 모자를 쓰고 키가 큰 이가 알렌이고 가운데 여자가 그의 아내이다. 그는 1903년 6월 유럽을 거쳐 10월에 미국으로 돌아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11월에 귀환했는데, 미국에 있을 때 일리아노이주 필라델피아의 그레이브스(C.H. Graves)가 운영하는 유니버셜 사진관에서 인화했다.

2 선천북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평안북도 선천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란 명칭을 두고 평양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만큼 복음의 성읍이었다. 1897년에 설립된 선천북교회를 중심으로 선천 남교회(1911년), 선천중앙교회(1930년), 선천동교회(1931년)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교인들의 주일성수로 인해 상인들조차 장사를 잠시 중지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선천에는 신성학교, 보성학교, 미동병원, 대영서원들 기도교계 학교와 기관들이 일찍부터 자리하였고, 그 결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김석창, 장이욱, 백영엽 등 교계의 주요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사진은 1918년 9월 선천북교회에서 열린 제7회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의 모습이다. 선교사 43명, 한국인 목사 67명, 장로 67명, 합 177명이 참석하여 김선두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뒤에 보이는 선천북교회 예배당은 1906년에 교인 헌금 4만 6천량으로 마련한 것인데 전통 한옥 기와집을 십자 형태로 지었다. 이는 남녀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예배당 내부는 가운데 교차점에 위치한 강단을 사방 출입구 쪽보다 낮게 설치하여 경사진 마룻바닥에 앉아 회중이 설교자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극장식으로 꾸몄다.

3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 총회(1934년)

  1884년 선교를 시작한 장로교회는 1907년 노회를 조직하였으며 1912년 총회를 조직하였다.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는 1934년에는 전국에 24개의 노회를 조직하였고, 2,729교회, 목사 488명, 교인 298,431명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1934년 9월 7일부터 14일 까지 평야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23차 총회는 한국 개신교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전국에서 120여 명의 총대들이 모여 투표한 결과 회장에 이인식 목사가 선출되었다.

사진은 폐회 하루 전인 1934년 9월 13일에 서문밖교회 앞마당에서 촬영한 총대들의 무습이다. 앞에서 세 번째 줄에 평양 선교 개척자 마펫, 청주 선교 개척자 밀러 선교사의 모습과 함께 총회장을 세 번 역임한 이자익 목사, 해방 후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 등의 모습이 보인다. 2층 발코니에는 중국 중화기독교회 내양노회 및 산동교회에서 보낸 축하 족자와 휘장이 걸려 있다. 산동 선교는 1912년 한국 장로교회 총회 창설 기념으로 시작한 선교 사업으로 한국 교회가 일찍이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모하여 선교국가로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4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기념예배(1934년)

  1934년 9월 10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거행된 한국 장로교회 선교 50주년(희년) 기념 축하식이 열렸다. 축하식은 평양에서 열린 제23차 총회 기간(9월 7-14일) 중에 열렸는데 그 내용을 총회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후 2시에 본 총회가 평양 숭실 대강당에 회집하야 50주년 희년 기념식을 거행할 새 평양성 각 교회 교우들과 각처로서 온 귀빈들과 평양성 각 교회 내 각 중등 이상 학교생들 합 5천여 명이 모여 회장 이인식 씨의 간단한 개회사가 있은 후 곽진근 씨로 찬송가 제98장을 인도 합창하고 김석창 씨로 기도하고 김강선 씨로 성경 로마 10장 1절로 15절까지 낭독하고 펴양성 연합 찬양대의 찬양이 있은 후 김길창 씨의 교회 약사와 길선주 씨의 기념사와 차제일 씨의 독창으로 이어서 중국 산동대회 대표의 축사를 비롯하야 총독, 평남지사, 중국 루터교회 대표,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씨, 연전 교장 원한경 씨, 성서공회 대표 민휴 씨, 기독신보 사장 전필순 씨의 축사가 있은 후 서기가 외국과 각 단체에서 온 축전장을 낭독하고 찬송가 제1장을 합창하고 마포삼열 목사의 축도로 회장이 희년기념 축하식이 폐회됨을 선언하다.”

사진은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진행 주인 희년 기념 축하식을 촬영한 것이다. 가운데 휘장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여자와 남자가 좌석을 달리하여 앉은 모습이 이채롭다. 강단 아래 오른쪽 귀빈석 제일 뒤쪽에 이날 축도를 맡았던 평양 선교 개척자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의 모습(흰 양복 의자에 앉은 이)이 보인다.

   

5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 총회 환영 아치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 총회를 기념하면서 평양 거리에 설치된 환영 아치. 사진 왼쪽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라는 글귀와 오른쪽에는 “제1회 전조선면려회4년대회”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6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 총회 기념 전시회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 총회를 기념하여 평양 마펫 기념관에서 열린 전시회. 중앙에 “축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3회 총회”라는 글귀가 보인다. 23회 총회는 1934년 9월 7일부터 14일 까지 평야 서문밖교회에서 열렸고, 희년총회라고 불렸다.

   

7 서울지역 부흥회를 인도한 길선주

1910년대 서울 부흥 집회를 마치고 교계 인사들과 촬영한 사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중에 하나였던 길선주 목사는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전국 가지를 돌며 순회 부흥회를 실시하였다.

   

8 주기철 목사와 송영길 목사 환영기념

 1937년 4월, 평양 산정현 교회 부목사로 부임한 송여길(宋永吉) 목사를 환영하는 산정현 교회 제직들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당회장 주기철 목사의 미소가 온화하다. 마산문창교회에서 목회한던 주기철 목사는 오산학교 은사인 조만식 장로의 요청으로 이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산정현 교회는 1906년 1월 평양 널다리골(板洞)의 마펫 선교사 옛 주택에서 1백명 미만의 교인들이 예배를 들리다가 1년 만에 교인들이 2백 명으로 늘어나자 1907년 9월에 학동(鶴洞) 산정재 언덕에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산정현 교회는 1911년 105인사건 때 김동기 장로가 옥고를 치루었고, 1919년 삼일운동 당시에는 당회장 강규찬 목사와 김예진 집사 그리고 조만식 집사 등이 평양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9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와 전교생

  1937년 6월, 엥겔(Gelson Enge1868-1939) 교수 환송회 때 촬영된 평양신학교 교사와 학생 및 교수진. 이 사진에는 엥겔 교수의 환송일이 1932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평양신학교를 떠난 것은 1937년이다. 앞줄 지팡이를 의지한 마펫 선교사의 오른 쪽 두 번째 로만칼라를 하고 있는 엥겔 등 당시 교수진과 학생들이 모두 보인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로 알려진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선교공의회가 신학교 설립을 결의한 후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술막골에 세워졌다. 당시 교수로는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과 리(G. Lee, 이길함)가 있었고, 최초의 학생은 평양중앙교회 방기창과 김종섭이었다. 1907년 제1회 졸업생은 서경조·이기풍·한석진·길선주·양전백·송인서·방기창이었다. 1908년 5월, 시카고의 맥코믹 여사(Mrs. Nettel Flower C. McCormick)의 지원으로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의 넓은 대지(약 6,000평) 위에 착공된 한식 2층의 교사(校舍)가 다음해 에 준공되었다. 교사의 동남쪽 언덕 위에 기숙사 여섯 동이 건축되었는데, 맥코믹 기념 기숙사, 남장로교의 알렉산더 기념 기숙사, 그 뒤에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지은 마르다 기념 기숙사,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회에서 지은 빅토리아 기념 기숙사 등이 있었다.

   

10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와 직원들

  1930년대 촬영된 것으로 평양신학교 교수들이 만찬을 하는 모습.

 

  11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라부열, 이눌서 교수 근속 기념

  1932년 촬영된 로버츠(Stacy L. Roberts 라부열)와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이눌서) 교수의 근속 기념사진. 로버츠는 1913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1924년에 사무엘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의 뒤를 이어 평양장로회신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교수로 봉직하였다. 레이놀즈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도 일하였다.

 

 

12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9회 졸업앨범

  1925년 12월 22일에 촬영된 졸업앨범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9회 졸업생들과 교수들이 있고, 중앙에 학교 교사가 있다.

 

  13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경남 32회 졸업생 왕길지 교수 환송기념

  1937년 3월 평양신학교 경남 졸업생 엥겔(Gelson Enge, 왕길지) 교수 환송기념 사진. 호주선교사로 내한 한 왕길지 교수는 경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평양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헬라어 등을 가르쳤다. 이 사진은 당시 32회 졸업생 중 경남노회에 속해 있던 학생들이 평양신학교를 떠나는 엥겔 교수를 기념하여 촬영한 것이다.

 

  14 예수행적차서록(耶蘇行蹟次序錄)

  1910년 간행된 기독교 전문도서. 아담스(J.E. Adams)역술. 대한예수교장로회 발행. 78×55cm. 32면. 순한글 내려쓰기.

탄생, 수난, 부활, 승천 등 예수의 생애를 7편으로 구분하여 4복음서의 내용을 이에 맞게 정리한 것. 부록으로 첨부된 “예수행적차서록도해”는 예수님의 행적을 시간과 장소별로 구분하여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이 좀 더 발전하여 1925년에 “예수행적연록”이 발행되었다. 이런 형태의 도표, 혹은 그림들은 “예레미야 도형”, “묵시도”, “후세도” 등 1930년대까지 신구약 단편들을 각각 해설하는 방식으로 발행되기도 하였다.

 

  15 예수행적연록(耶蘇行蹟年錄)

  1925년 간행된 성경 교육문서. 게일(J. S. Gale) 편집. 조선예수교서회 발행. 100.3×21.2cm. 12폭 접이식. 한글·한문 혼용 내려쓰기.

예수의 출생부터 수난,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에 이르는 생애를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즉 4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행적을 시간과 장소별로 구분하여 그 내용을 요약하여 놓았고, 각 요약문 아래에는 해당 복음서는 물론 장과 절을 기록하였다. 이 연록을 보면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셨고, 이것이 어느 곳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1910년 간행된 “예수행적차서록도해”의 발전된 형태로 추정된다.

   

16 후세도(後世圖)

  1930년대 발행된 것으로 추정됨. 작자 및 발행자 미상.

후세도는 요한계시록을 십자가·세 개의 연꽃·항아리와 성경 구절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특히 종말의 시기를 “무저항(無抵抗) - 천년왕 세계 - 영원무궁한 세계”를 꽃과 항아리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1910년대 중반에 발행된 “묵시도”(黙示圖)와 1923년에 발행된 “야소재림지도”(耶蘇再臨之圖)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면, 후세도는 영원무궁한 세계를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17 묵시록 도해(黙示錄 圖解)

  1930년대 사경회에서 사용되던 묵시도해. 87.5×97.5cm. 광목천.

예수탄생과 고난, 부활, 그리고 승천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 묵시록 도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말세 진행과정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지방 사경회 때마다 이런 묵시록 강의가 빠지지 않았다.

 

  18 주기철목사 친필 편지(朱基撤 牧師 親筆 便紙)

  1931년 6월 15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하던 주기철 목사가 장로교에서 탈퇴한 윤치병 목사에게 보낸 편지. 한글·한문 혼용 내려쓰기. 편지 22×24cm. 봉투 16.5×22cm.

 

  19 진리편독 삼자경(眞理便讀 三字經)

  1908년 간행된 기독교 계몽 도서. 존(G. John) 원저. 마펫(S. A. Moffet) 번역. 조선예수교서회 발행. 25.8×12cm. 152면. 내려쓰기.

천자문 식으로 되어 있어 초등학교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한자와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도리를 깨치도록 하였다.

 

  20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제1회회록(朝鮮耶蘇敎長監聯合協議會 第一回會錄)

  1918년 발행된 회의록. 기록자 김필수(金弼秀). 발행처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14.8×10.5cm. 12면. 국한문 혼용 내려쓰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립회의 의사록과 회원명부, 협의회 헌법이 수록되어 있다.

 

  21 예수교장로회신학생명적비고(耶蘇敎長老會神學生名蹟備考)

  1914년 5월 간행된 평양신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 명부. 평양 예수교장로회신학교 발행. 차상진(車相晉)·함열(咸說) 공동 편집. 평양 광문사 인쇄. 48면. 순한문 내려쓰기.

1914년 5월 현재로 평양신학교 역대 졸업생 102명과 재학생 239명의 명부를 정리한 것이다.

   

22 장로교회신학교 요람(長老敎會神學校 要覽)

  1916년 2월에 간행된 평양신학교 요람. 마펫(Samuel A. Moffet) 저술. 조선예수교서회 발행. 15×22.3cm. 49면. 국한문 혼용 내려쓰기.

이 요람은 이사회·교사·신학교 약사·학과 및 학생자격·학교 및 기숙사 등 평양신학교를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초기 평양신학교 전경과 각 선교부별 기숙사 그리고 졸업생 등에 대한 이미지를 수록하고 있다.

 

  23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학우회보(朝鮮耶蘇敎長老會神學校 學友會報)

  1923년 1월에 창간된 평양신학교 학우회 회보. 매년 2회 예수교장로회신학교 발행. 편집인 오천경(吳天卿). 발행인 클라크(C.A. Clark). 22×15.5cm. 40면. 국한문 내려쓰기.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학우회에서 발행한 잡지로 연 2회 발행하였다.

 

  24 신학지남(神學指南)

  1918년 3월 2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발행한 제1호 신학지남. 편집인 엥겔(Gelson Engel, 왕길지). 발행인 그라크(Charles A. Clark, 곽안련) 선교사. 23×14.5cm. 국한문 혼용 내려쓰기. 이 잡지는 1년에 4회 발행되었다.

 

  25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 5년급교재

  1910년대 평양신학교 5년급 교재로 붓글씨로 이서하였다. 이 교재에는 구약의 예언서 개론, 성신공과(聖神工淉), 신약의 히브리인서 개론 등이 실려 있고, 담당 교수가 기록되어 있다. 구약 예언서 개론은 게일(J.S. Gale, 기이부) 교수, 성신공과(聖神工淉)는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이눌서) 교수, 히브리인서는 로버츠(Stacy L. Roberts, 라부열) 교수가 각각 담당하였다.

   

26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프린트 교재

  1931년 9월 평양신학교에서 발행된 교재로 「신학난제」「기독논리」「세계종교」「사회주의」라는 과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특히 「사회주의」에 대한 교육이 정식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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