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한국 장로교 독노회의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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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흥운동
(1) 원산부흥운동
부흥운동은 원산의 영적 각성에서 시작되었고, 원산부흥운동은 1903년 8월 원산의 집회와 예배 중에 하디(R. A. Hardie)의 영적 각성과 회개로부터 시작됐다.
(2) 평양대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와 기도회라는 두 기둥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사경회는 1890년 기포드가 언더우드 집에서 시작했다. 1906년 8월 평양의 장·감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한 주간의 사경회를 가졌고, 선교사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죄를 자복했다. 9월 서울에서 부흥전도자 하워드 존스톤(H. A. JohnstonD. D.)은 집회를 인도하면서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평양의 선교사들 20여 명은 그 후 4개월 동안 함께 기도하며 교파를 뛰어넘는 일치를 발견했다. 존스톤은 10월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성신 받기를 원하는 자는 기립하라” 하니 길선주 장로가 일어섰고 길선주는 평양의 교인들과 함께 1906년 가을부터 연말까지 새벽기도를 하며 부흥을 준비했다.
1907년 1월 평안남도 남자사경회가 전국적으로 1,500명이 모인 가운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됐다. 평양 남자사경회는 이렇게 죄 고백과 회개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일어났다. 그리고 부흥운동은 선교사들, 학생들과 신학생들, 여성들, 그리고 전국의 교회로 급속히 확산됐다.
(3) 부흥운동의 결과
① 회개와 중생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신앙 정착
② 하나님과 개인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회복
③ 한국교회의 도덕적 향상과 경건성 확대, 신앙의 공동체성 성립
④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영성과 도덕성을 새롭게 인식
⑤ 토착적 한국교회의 의례와 영성 구형
⑥ 한국교회의 성장 촉진
⑦ 한국인 지도자들의 영적성숙과 교회조직을 촉진
⑧ 한국교회 안에 초교파적 에큐메니칼 일치 도출
⑨ 부흥운동의 영향력이 교회를 넘어 사회, 정치, 문화의 영역까지 확대
(4) 백만명구령운동
1909년 10월 재한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는 기도위원회를 만들고, “그리스도를 위해 100만 명의 영혼”을 놓고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2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4명씩 전도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지만 교세통계를 보면 1909년에 119,273명에서 1910년 140,470명으로 2만 명을 약간 넘는 성장에 그쳤다. 그러나 일본 통감부는 백만명구령운동을 ‘백만 명의 기독교군사’를 양성하는 운동으로 보았고, 뒤에 ‘105인 사건’을 조작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됐다.
2) 독노회 조직과 선교
(1) 독노회 조직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조직됐다. 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치권과 권징의 권한을 갖는 한국 장로교회의 탄생으로서 독노회가 채택한 신조와 규칙은 한국 장로교회가 사용하는 헌법의 뿌리가 됐다. 총대는 한국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원 9명으로 총 78명이었다. 당시 한국 장로교인의 숫자는 약 70,000명에 이르렀다. 노회의 임원은 회장 마포삼열, 부회장 방기창, 서기 한석진, 부서기 송인서, 회계 이길함이 선출되었고 만국장로교회 연합공의회에 한국교회가 조직됐음을 통지하고 회원으로 등록했다. 1911년 제5차 독노회에서는 이듬해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기존의 ‘7개 대리회’를 ‘7노회’로 승격할 것을 가결하고, 이듬해 3월 1일 안으로 노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 전라노회 : 노회장 김필수 / 일시장소 : 1911년 10월, 전주 서문밖교회
② 경충노회 : 노회장 원두우 / 일시장소 : 1911년 12월, 새문안교회
③ 황해노회 : 노회장 이원민 / 일시장소 : 1911년 12월, 모동교회
④ 경상노회 : 노회장 왕길지 / 일시장소 : 1912년 1월, 부산진교회
⑤ 남평안노회 : 노회장 주공삼/ 일시장소 : 1912년 1월, 장로회신학교
⑥ 북평안노회 : 노회장 노세영/ 일시장소 : 1912년 2월, 선천북교회
⑦ 함경노회 : 노회장 부두일/ 일시장소 : 1912년 2월, 원산 상리교회
(2) 제주선교
1907년 독노회는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라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1907년 장로교회 통계를 보면 당시 예배드리는 교회는 1,022개, 전국에 있는 장로교인 수는 72,968명,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의 자체 인력은 목사 7명, 장로 49명, 조사 105명, 남녀전도인 226명로 목회인력의 절대 부족상황에서도 소중한 목회자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3)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독노회의 중요한 역할은 한국인 목사를 안수하여 지도력을 이양하는 것이었다. 최초로 안수 받은 7명의 목사들은 5년간의 신학교 수업과 장로 및 조사생활을 통해 목회훈련을 받았다. 길선주 목사는 장대현교회 시무목사로, 그 외 모두는 전도목사로 안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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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생애 |
출생지 |
기존
종교 |
선교사
관계 |
회심
(세례) |
신학
수업 |
사역지 |
총회
지도력 |
서경조 |
1852~
1938 |
의주 |
|
언더우드 |
1883
(1887) |
1904
편입 |
황해, 솔래,
서울, 경기, 중국 |
|
한석진 |
1868~
1939 |
의주 |
|
마포삼열 |
1891
(1895) |
1904
편입 |
평양, 일본,
서울, 안동, 마산,
신의주 |
1917년
총회장 |
송인서 |
1867~
1929 |
평양 |
불교
도교 |
마포삼열 |
1891
(1895) |
1902 |
평남 |
1917년
총회장 |
양전백 |
1869~
1933 |
의주 |
유학 |
마포삼열
위더모어 |
1892 |
1902 |
평북(의주, 선천) |
1916년
총회장 |
방기창 |
1851~
1911 |
신천 |
유학
동학 |
마포삼열 |
1893 |
1901 |
중국, 용강, 선교
신천, 평양 |
|
길선주 |
1869~
1935 |
안주 |
도쿄 |
마포삼열
이길함 |
1896
(1897) |
1903 |
평양
(장대현교회) |
|
이기풍 |
1865~
1942 |
평양 |
도쿄 |
마포삼열
소안론 |
1895
(1896) |
1902 |
제주도 전남 |
1921년
총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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