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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소개 총회역사 설립배경

설립배경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설립배경을 안내해드립니다.

제1장 한국장로교회의 시작

01
복음의 선각자들과
신앙공동체
1832년 최초로 한국선교를 시도한 귀츨라프 선교사를 비롯해서 1866년 토마스 목사 등이 쇄국정책으로 굳게 닫힌 조선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조선과 청나라 국경지대에서 1872년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의주 상인들을 만났고 이들 중에 최초의 개신교 수세자가 나오게 되었다. 의주 출신 조선인들은 선교사들을 도와 성경번역에 참여해 1881년 10월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간행됐고 1882년에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 예수셩교요안ᄂᆞ복음젼서가 간행됐다. 그후 신약성경 의 각 권들이 간행되서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 예수셩교젼셔가 출간됐다. 정부의 엄중한 단속과 처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기독교인들은 국내로 성경을 반입, 반포했고 이러한 토양 위에서 조선인에 의한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마침내 1884년 소래교회가 설립됐다.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이수정은 1883년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고 현토한한신약전서라고 한문성경에 한글로 토를 다는 작업, 한글 마가복음 번역 작업을 했다. 이수정은 미국 선교잡지 에 조선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함으로서 미국장로교선교부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1885년 1월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간단한 우리말을 가르치는 등 선교의 교량역할을 했다.

 

1) 장로교선교회의 입국

(1) 미국 북장로교회
헤론이 의료훈련을 더 받고 선교지로 떠나겠다는 요청에 해외선교부는 중국에서 일하던 알렌을 한국으로 파송했고 알렌은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1885년 일본을 거쳐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제중원의 화학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2)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헨리 데이비스는 1889년 한국선교사로 목사안수를 받고 1889년 10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몇 개월 만에 질병으로 사망했고 1891년 맥케이 목사 부부, 멘지스, 포오셋, 페리 등이 부산에 도착하면서 호주장로회의 본격적 한국선교사 시작됐다.

(3) 미국 남장로교회
미국 유학 중이던 윤치호가 미국신학생 해외선교연맹대회에서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을 듣고 감동받은 루이스 테이트, 카메론 존슨, 윌리엄 레이놀즈는 한국선교사로 자원했고 윌리엄 전킨과 함께 1892년 남장로교회 7인의 선발대로 파송됐다.

(4) 캐나다 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는 1898년 한국선교를 시작했지만 제임스 게일은 캐나다YMCA의 지원을 받아 이미 1888년 내한했고 토론토실업인들의 지원으로 펜윅이 1889년, 토론토의과대학기독교청년회의 후원으로 하디와 에비슨이 각각 1890년, 1893년에, 윌리엄 맥켄지가 캐나다연해주지역장로교대학선교협회의 파송을 받아 1893년 한국에 왔다.

 

2) 장로교선교회의 초기 선교활동

(1) 의료선교
선교사들은 제중원의 의사와 교사로 소속되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1885년 헤론 의사부부, 여성 의료인 1886년 애니 앨러즈가 부인과 책임자로, 1888년 여자 의사 릴리아스 호튼이 부임했다. 알렌은 1885년 의학당을 설립을 시작했다. 에비슨 선교사는 1899년 세브란스의 기부를 받아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했다. 1904년 대한제국 정부는 제중원의 건물 및 대지를 북장로교회부터 환수했다.

(2) 교육사업
언더우드는 한국근대화교육의 선구자였다. 1886년 정부의 승인을 받아 고아원 성격을 띈 기숙학교 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를 세웠다. 1902년 게일은 연지동으로 교사를 옮겨 예수교중학교를 개교했고 경신학교라 개칭했다. 애니 엘러즈는 1887년 최초 여학교인 정동여학교를 시작했고 1890년 도티가 내한하여 학교를 발전시켰다. 1909년 대한제국 학부의 인가를 받아 사립 정신여학교가 됐다. 1909년까지 설립된 학교들 중에 장로교 학교가 605개교에 학생 14,708명, 감리교 학교가 200개교에 학생 6,423명, 기타 성공회와 천주교 등을 합해 950개 학교가 있었다.

(3) 성경번역
1887년 서울에 모인 선교사들은 성경번역과 감수를 목적으로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했다. 로스역개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번역을 결정했다. 1900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영국성서공회, 미국성서공회가 협력해서 시험판 신약성경을 출간했고 1906년 수정을 거친 공인판, 1904년 공관복음 국한문혼용본, 1906년 신약젼서국한문이 발간됐다. 1910년 구약번역이 완성되어 1911년 셩경젼셔가 출간됐다. 이 성경은 1938년 개역과 대비되어 후에 구역이라 칭하게 됐다. 성경번역에서 신명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언더우드가 중국과 한국의 종교사를 연구하여 한국인들이 초월적 절대적 하ᄂᆞ님 신관을 가진 것과 성경적 유일신 개념과 상통한다고 결론지었다. 게일은 주시경으로부터 하ᄂᆞ님이란 말이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 외에 유일성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1900년부터 유일신을 강조하는 뜻으로 하ᄂᆞ님을 선호했다.

(4) 찬송가 출판과 문서사업
언더우드는 최초로 4성부의 악보가 포함된 찬양가(1893)를 출판했고 게일과 기포드 부인은 찬셩시(1895)를 편집, 출간했다. 1902년 장로회공의회는 찬셩시를 공인찬송가로 결정했다. 1897년 언더우드가 주간지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했다. 게일은 1893년 한글문법책 사과지남을 출판했고 1897년 한영ᄌᆞ전, 1890년 한국어회화입문, 게일과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1894년 한영ᄌᆞ전과 영한ᄌᆞ전을 출간했다. 1890년 언더우드, 헤론, 올린저 등의 노력으로 장감연합문서사업기관인 조선성교서회가 조직됐다. 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와 정기간행물의 잡지류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후에 대한성교서회-조선예수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로 변경됐다.
02
장로회공의회
(1893 – 1907)

1) 장로회공의회

(1) 선교사공의회(1893 – 1900)
한국장로회선교사들은 치리회의 전 단계로 장로회(선교사)공의회를 조직했다. 1889년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가 조직한 장로교미슌연합공의회를 시작으로 1893년 조선 땅에 개신교신경과 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 설립을 목적으로 「장로교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를 조직했다.

(2)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1901 – 1906)
1901년 장로회공의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선교사들의 영어공의회와 한국인들의 조선어공의회가 함께 모였기 때문에 합동공의회라 칭했다. ① 영어공의회는 치리와 권징을 행사했다. ② 1907년 조선야소교장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독(립)노회 설립을 준비했다. ③ 정교분리 원칙을 정해 교인 개인의 정치운동과 교회는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했다. ④ 1901년 신학수업과 신학교설립 준비가 시작됐다. ⑤ 치리권을 노회로 이양하기로 하고 했다. ⑥ 조선어공의회는 매년 5~10개 목회주제로 토론회를 가지며 한국인 지도자들을 훈련했다. ⑦ 공의회는 기근으로 어려움 당한 교회를 전교회가 헌금해 구제했다. ⑧ 한글철자법 개정 및 통일안을 논의됐으나 최종 수용되진 않았다. ⑨ 감사절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⑩ 하와이 이민들의 설교자 파송요청에 기존 한인감리교회와 연합하도록 유도했다.

 

2) 장로교선교회의 선교정책과 연합운동

(1) 네비우스 선교정책
네비우스의 주장은 종래 선교사들이 선교지부 안에 학교, 병원, 교회를 세우고 선교회의 자금으로 본토 전도인을 고용해서 일을 맡기는 선교방식을 가능한 빠르게 본토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토착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1893년 장로교선교공의회는 네비우스방법에 기초해 선교정책을 세웠다. 자진전도, 자력운영, 자주치리의 3자원리로 전도, 교육, 의료사업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자립이 안되는 지역에서는 실천이 어렵고 1907년 독노회 설립으로 형식상 완성되었으나 내용상 선교사들의 통제와 지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한국인 교역자 양성의 교육수준을 낮게 잡아 향후 한국교회 발전에 큰 장애를 초래했다.

(2) 선교지 분할협정 체결(1909)
19세기말 내한한 장·감 양 교단 선교사들은 선교구역 분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미국, 호주, 캐나다의 다른 교단들이 속속 입국하자 1893년 선교구역 분할과 선교 협력에 대한 협정을 했으나 미국 감리교의 최종 승인을 얻지 못하여 공식 채택하진 못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이후에 도착하는 다른 장로교 선교부에 자기의 선교구역 지역을 양도했다. 1905년 장로교 4개 교단(미국북, 미국남, 호주, 캐나다)과 감리교 2개 교단(미국북, 미국남)이 재한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를 조직하고 선교구역 조정과 협정을 계속 추진했고 1914년 미국북장로교가 경상남도를 호주 장로교에 완전 이양하면서 선교구역 분할을 매듭지었다. 인구 5천명 이상의 대도시 등에서는 두 개 이상의 선교부가 공동사역하고, 5천명 이하 도시에서는 한 개의 선교부가 전담하는 교계예양(선교지역분할협정)이라 불린 이 협정은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 중복을 피하고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추진한 초교파적 선교협력이었다.

(3) 재한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
한국에 하나의 개신교회를 조직하자는 논의는 1902년부터 시작되었고 1904년 예수교회라는 명칭을 결정하고 이 이름 아래 각 교단의 명칭을 예수교 장로회, 예수교 감리회로 사용하기로 했다. 1905년 장·감 두 교단은 선교사업에 협력하여 마침내 한국에서 단 하나의 개신교회를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재한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미국남장로교회와 일부 선교사들은 교리적인 이유로 장·감 연합을 우려했다. 1911년 제7차 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는 개신교선교연합공의회로 재조직됐다. 교파일치를 포기하고 다양한 연합활동을 추진해 초교파적 에큐메니칼운동의 효시가 됐다.

 

3) 초기 장로교회의 형성과 발전

국내 최초의 한국인 수세자는 노춘경이었다. 그는 한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탐독하고 언더우드를 찾아와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전서와 교리서를 읽고 외국인들의 예배에 참여하다가 1886년 언더우드의 집례와 아펜젤러의 보좌로 세례를 받았다. 1883년 황해도 소래로 이주한 서경조에 의해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라는 소래교회가 1884년 형성됐다. 1887년 언더우드는 14명 한국인 세례교인과 2명의 장로를 장립하고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 정동교회(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1893년 곤당골교회(승동교회), 1894년 연못골교회(연동교회)가 설립됐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서울 다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지역은 서북지역이었다. 1893년 평양선교기지를 개설, 널다리교회(장대현교회)와 인근 교회들이 설립되고 숭실·숭의·장로회신학교 등이 세워졌다. 1899년 대구선교지부, 1910년 안동선교지부가 세워졌고 청주에도 선교지부를 설립하고 밀러 선교사를 파송했다. 경상남도와 부산은 미국북·호주 장로교가 같이 선교를 시작했는데 북장로교가 1891년 초량에 선교기지를 설치했고 1893년 호주장로교와 북장로교가 경남지역을 분할했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들이 부산진(1891), 진주(1905), 마산(1911), 통영(1913), 거창(1913) 등에 설립됐다. 남장로교선교사들은 전라도 선교를 담당했고 전주(1895), 군산(1896), 목포(1898), 광주(1904), 순천(1912)에 선교지부를 설립했다. 캐나다선교사들은 1898년 원산에서 사역을 시작해서 1901년 성진, 1904년 함흥에 선교지부를 개설했고 그 후 회령(1912)과 용정(1913)에 선교지부를 설치했다.
03
한국 장로교
독노회의 성립

1) 대부흥운동

(1) 원산부흥운동
부흥운동은 원산의 영적 각성에서 시작되었고, 원산부흥운동은 1903년 8월 원산의 집회와 예배 중에 하디(R. A. Hardie)의 영적 각성과 회개로부터 시작됐다.

(2) 평양대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와 기도회라는 두 기둥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사경회는 1890년 기포드가 언더우드 집에서 시작했다. 1906년 8월 평양의 장·감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한 주간의 사경회를 가졌고, 선교사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죄를 자복했다. 9월 서울에서 부흥전도자 하워드 존스톤(H. A. JohnstonD. D.)은 집회를 인도하면서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평양의 선교사들 20여 명은 그 후 4개월 동안 함께 기도하며 교파를 뛰어넘는 일치를 발견했다. 존스톤은 10월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성신 받기를 원하는 자는 기립하라” 하니 길선주 장로가 일어섰고 길선주는 평양의 교인들과 함께 1906년 가을부터 연말까지 새벽기도를 하며 부흥을 준비했다. 1907년 1월 평안남도 남자사경회가 전국적으로 1,500명이 모인 가운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됐다. 평양 남자사경회는 이렇게 죄 고백과 회개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일어났다. 그리고 부흥운동은 선교사들, 학생들과 신학생들, 여성들, 그리고 전국의 교회로 급속히 확산됐다.

(3) 부흥운동의 결과

① 회개와 중생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신앙 정착 ② 하나님과 개인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회복 ③ 한국교회의 도덕적 향상과 경건성 확대, 신앙의 공동체성 성립 ④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영성과 도덕성을 새롭게 인식 ⑤ 토착적 한국교회의 의례와 영성 구형 ⑥ 한국교회의 성장 촉진 ⑦ 한국인 지도자들의 영적성숙과 교회조직을 촉진 ⑧ 한국교회 안에 초교파적 에큐메니칼 일치 도출 ⑨ 부흥운동의 영향력이 교회를 넘어 사회, 정치, 문화의 영역까지 확대

(4) 백만명구령운동

1909년 10월 재한개신교선교통합공의회는 기도위원회를 만들고, “그리스도를 위해 100만 명의 영혼”을 놓고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2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4명씩 전도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지만 교세통계를 보면 1909년에 119,273명에서 1910년 140,470명으로 2만 명을 약간 넘는 성장에 그쳤다. 그러나 일본 통감부는 백만명구령운동을 ‘백만 명의 기독교군사’를 양성하는 운동으로 보았고, 뒤에 ‘105인 사건’을 조작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됐다.

 

2) 독노회 조직과 선교

(1) 독노회 조직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조직됐다. 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치권과 권징의 권한을 갖는 한국 장로교회의 탄생으로서 독노회가 채택한 신조와 규칙은 한국 장로교회가 사용하는 헌법의 뿌리가 됐다. 총대는 한국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원 9명으로 총 78명이었다. 당시 한국 장로교인의 숫자는 약 70,000명에 이르렀다. 노회의 임원은 회장 마포삼열, 부회장 방기창, 서기 한석진, 부서기 송인서, 회계 이길함이 선출되었고 만국장로교회 연합공의회에 한국교회가 조직됐음을 통지하고 회원으로 등록했다. 1911년 제5차 독노회에서는 이듬해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기존의 ‘7개 대리회’를 ‘7노회’로 승격할 것을 가결하고, 이듬해 3월 1일 안으로 노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 전라노회 : 노회장 김필수 / 일시장소 : 1911년 10월, 전주 서문밖교회 ② 경충노회 : 노회장 원두우 / 일시장소 : 1911년 12월, 새문안교회 ③ 황해노회 : 노회장 이원민 / 일시장소 : 1911년 12월, 모동교회 ④ 경상노회 : 노회장 왕길지 / 일시장소 : 1912년 1월, 부산진교회 ⑤ 남평안노회 : 노회장 주공삼/ 일시장소 : 1912년 1월, 장로회신학교 ⑥ 북평안노회 : 노회장 노세영/ 일시장소 : 1912년 2월, 선천북교회 ⑦ 함경노회 : 노회장 부두일/ 일시장소 : 1912년 2월, 원산 상리교회

(2) 제주선교
1907년 독노회는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라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1907년 장로교회 통계를 보면 당시 예배드리는 교회는 1,022개, 전국에 있는 장로교인 수는 72,968명,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의 자체 인력은 목사 7명, 장로 49명, 조사 105명, 남녀전도인 226명로 목회인력의 절대 부족상황에서도 소중한 목회자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3)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독노회의 중요한 역할은 한국인 목사를 안수하여 지도력을 이양하는 것이었다. 최초로 안수 받은 7명의 목사들은 5년간의 신학교 수업과 장로 및 조사생활을 통해 목회훈련을 받았다. 길선주 목사는 장대현교회 시무목사로, 그 외 모두는 전도목사로 안수받았다.
이름 생애 출생지 기존
종교
선교사
관계
회심
(세례)
신학
수업
사역지 총회
지도력
서경조 1852~
1938
의주   언더우드 1883
(1887)
1904
편입
황해, 솔래,
서울, 경기, 중국
 
한석진 1868~
1939
의주   마포삼열 1891
(1895)
1904
편입
평양, 일본,
서울, 안동, 마산,
신의주
1917년
총회장
송인서 1867~
1929
평양 불교
도교
마포삼열 1891
(1895)
1902 평남 1917년
총회장
양전백 1869~
1933
의주 유학 마포삼열
위더모어
1892 1902 평북(의주, 선천) 1916년
총회장
방기창 1851~
1911
신천 유학
동학
마포삼열 1893 1901 중국, 용강, 선교
신천, 평양
 
길선주 1869~
1935
안주 도쿄 마포삼열
이길함
1896
(1897)
1903 평양
(장대현교회)
 
이기풍 1865~
1942
평양 도쿄 마포삼열
소안론
1895
(1896)
1902 제주도 전남 1921년
총회장
제 109회기 총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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