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회 총회에 청원한 총회 지정 한국기독교사적 9호, 10호에 대한 청원 내용입니다.
가. 청주 양관 6동 중에 5동
민노아(F. S. Miller) 선교사가 1904년 청주에 주재한 이래 1907년부터 청주시 탑동에서양식 주거와 관사들(일명 洋館) 총 7동이 건축되었다. 그중 청주시 남문로 청주제일교회 옆에 위치한 소민병원 진료소는 철거되었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6동은 1983년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중 소열도 목사가 오래 거주했던 도 유형문화재 제133-1호(솔타우기념관 명명) 건물은 일반인에게 매도되어 부득이 제외되었다.
청주 양관은 청주지방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로서 청주 선교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개화 바람을 일으킨 지방의 명물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고 우리나라 건축이 현대화되는 중간 과정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 제9호 포사이드기념관(도 유형문화재 제133-4호)
내용 : 청주 탑동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조적조, 511㎡,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포사이드(H.M.Forsyth) 부부가 보낸 3천 달러로 지은 것으로 1907~11년 간 건축되었다. 현재 이 건물 옆에는 민노아 선교사, 부례선 선교사, 소열도 목사 딸의 묘가 이전되 어 있고 선교사의 뜻을 기리기 이해 충북노회 산하 교회들이 헌금하여 세운 선교사기념비가 있다.(현재 일신여중 미술관으로 사용)
2) 제9-1호 로위기념관(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
내용 : 1911년 지어진 조적조, 495㎡,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다. 1910년 해외선교를 꿈꾸다 죽은 두 아들을 기념하여 미국 컨테키 주에 사는 매클렁(J.S.McClung) 부부가 보낸 8백 달러를 기반으로 매클렁 성경학원과 함께 지었다. 지붕은 회색 조선 기와를 올렸고 벽돌 벽면에 고딕형 창문의 2층 건물이다.(현재 일신여고 교목실로 사용)
3) 제9-2호 던컨기념관(도 유형문화재 제133-6호)
내용 : 1920년 완공된 조적조, 543.8㎡,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다. 1908년 미국의 던컨(J.P.Duncan)부인이 병원 건축비로 헌금한 7천 달러로 건축되었다. 조선 기와 지붕에 지하1층, 지상2층 붉은 벽돌집으로 진료실과 수술실을 갖춘 이 건물은 던컨기념병원, 한국인들에게는 소민병원(입원실)으로 불렸다.(현재 일신여고 양호실, 상담실, 선교실, 도서실로 사용)
4) 제9-3호 밀러기념관(도 유형문화재 제133-3호)
내용 : 1925년에 건축된 조적조, 580.1㎡,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다. 전통 한옥의 다각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헐리고 없지만 과거 건물 옆으로 성서학원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있어 청주의 명물이기도 했다.(현재 일신여고 생활관으로 사용)
5) 제9-4호 펄디기념관(도 유형문화재 제133-2호)
내용 : 1932년에 지어진 조적조, 543.8㎡, 지하1층, 지상3층 건물이다. 부례선 선교사의 순직 소식을 들은 미국 모교회와 친지 그리고 주일학교 학생들의 헌금으로 건축되어 ‘부례선 목사 기념 성경학교’라고 불렸고 유일하게 함석으로 지붕을 처리했고 건물 형태는 평양 신학교와 비슷하게 설계되었다.(현재 충북노회 사무실, 성서신학원 등으로 사용)
나. 제10호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내용 : 1950년 12월 청송 화목교회에 부임한 엄주선 강도사는 1951년 2월 17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회 안에서 기도하다가 공산군 패잔병들에게 납치되었다. 대한 추위 속에서도 피랍된 사람들 중 신중건 씨가 잠결에 납치되어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것을 보고 자기의 외투를 벗어 주었고 인민군 10사단본부로 끌려가서도 사단장 김두봉에게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전도하다 여러 차례 폭행을 당하고 ‘지금이라도 예수를 안 믿겠다고 약속하면 죽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자 춘산면 옥정동(바랑골)로 끌고가 죽창으로 19군데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엄주선 강도사는 경북 유일의 6.25 동란 순교자로서 함께 피랍되었던 생존자 신중건 씨가 당시 정황을 생생하게 증언(자필 기록)하였고 화목교회 박치환 장로, 양재관 장로, 엄규영 영수(부친)가 사체를 확인하고 박도선, 양원석, 김상정 집사 등이 현장에서 시신을 운구하여 경북노회葬으로 장례를 치루는 등 마지막 행적과 죽음을 증언하는 자료가 있고, 현재 교회와 노회가 도와 군의 재정 지원을 받아 공원화 작업을 완료하는 등 지역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명확한 현장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