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樹挺(1842-1887?) 사진 중앙에 한복을 입고 건을 쓴 사람
1882년 9월 제 4차 修信使 박영효 김옥균일행과 비공식수행원으로 渡日하여 3년 9개월간 체류.
당신 농학자요 기독자인 津田仙(쯔다센)에게 한문성서를 받음 그의 안내로 築地敎會에 출석 기독교에 감명을 받음
G.W.Knox(北 장로교 선교사)에게 1883년 4월 29일그의 나이 40세에 세례를 받음
이 사진은 1883년 (明治 16年) 日本의 全國基督敎徒大親睦會幹部) 인데 이수정( 흰 한복) 옆이 쯔다센이고 이 둘 사이 뒤가 內村監三(우찌무라 간죠) 그의 오른쪽이 靑山(아오야마학원 설립자) 그 왼쪽이 新島(니이지마) 同志社대학의 설립자(회중교회 목사이며 최초의 미국에서 힉위를 한자)
이 사진은 일본의 기독교회사에 중요한 사진인데 이 모임에 그는 쯔다센의 소개로 참석했다. 쯔다센은 세례받지 얼마되지 아니한 이 조선인에게 당일 개회 기도를 하도록 부탁을 하였는데 그는 아직 일본말이 서툴러 한글로 하였다.
후일 우찌무라는 그의 전기에서 쓰기를 "우리는 그의 기도의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그의 음성에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낌을 갖었다" 라고 썼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 최초의 세례자가 된 것이다.
그가 쯔다센을 만나게 된것은 1991년 수신사로 갔었던 知人인 安宗洙의 소개였다. 이수정에 앞서 안종수는 쯔다센의 농학에 대한 지식과 기독교사상에 호감을 갖었고 특히 그의 집에 걸려 있던 산상수훈 족자에 적힌 뜻을 듣고 지금 까지 배우고 들은 것과는 다른 새로운 지식과 사상에 대하여 크게 감명을 받았다.
쯔다센은 이 족자를 주겠다고 하자 안종수는 조선에서 이미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어 그것을 보관할 방법이 없자 사양했다.
귀국후 일본에 가게된 이수정에게 일본에 가거든 쯔다센을 꼭 만나라고 권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이수정이 쓴 한문족자와 이 족자는 同志社大學에 보관 되어 있다고 한다.
그후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했고 주일학교를 세웠고 미국에 선교사청원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인연으로 동양의 미지의 나라가 드디어 언더우드와 아빙돈을 래한하는 계기가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