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자료실 생명공동체운동 10년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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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은 제 107회 총회에서 채택된 기본안입니다.

계속해서 창조적인 의견들을 제안해 주시면 수합하여 기본안에 추가 반영하겠습니다.

생명목회/ 영등포노회 영등포교회

관리자 2003-04-17 (목) 14:11 21년전 2985  

생명목회
창립 1백주년 맞은 영등포노회 영등포교회  

'진등포'라 불리울 정도로 진흙투성이 땅이었던 영등포, 그러나 경인선과 경부선 개통으로 한반도 최대의 신흥도시가 되었다. 이 땅에서 1백년 동안 복음의 씨를 뿌려온 영등포교회. 이제 양적 성장을 넘어 영적 성숙에 박차를 가하며 제2의 성장기를 모색하고 있다.
<편집자>

◈ 지역 구원 향한 백년의 사랑
 
 창립 1백주년, 제2의 도약기 모색한다

 영등포 역과 시장이 밀집한 곳에 위치한 영등포노회 영등포 교회(김승욱 목사 시무). 영등포교회는 1백년 교회 역사와 규모에 걸맞는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영등포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선교 교육 봉사 등 수많은 사역 중에서 단연 두드러진 사역은 나눔과 섬김이다.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1백주년" 창립 1백주년을 맞아 영등포교회가 내걸은 슬로건이다. 이 한 마디가 영등포교회의 생명목회 방향을 함축하고 있다.

 "생명살리기라 함은 무엇보다도 영혼구령이 으뜸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니까요" 생명목회에 대한 담임 김승욱 목사의 생각이다. 김 목사는 "한 세기동안 영등포교회는 지역 복음화에 힘써왔다"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이제 우리는 이를 확장하여 지역을 섬기는 일에 힘쓸 것"이라 강조한다. 지역을 섬김으로써 지역사회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복음화를 추진하는 것이 생명살리기라는 설명이다.

 영등포교회 주변은 지역 특성상 상인들이 많다. 부부가 밤 늦도록 함께 맞벌이를 해야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김목사가 부임 후 얼마되지 않아서 일이라고 한다. 밤늦게 서재에서 책을 보고 귀가하던 김목사는 교회 앞 가로등 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때가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초등학생보다도 어린 아이들이 그 시간까지 바깥에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엄마 품에서 곤히 자야할텐데, 아이들은 부모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빈 집에 가기 싫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어린이 집이었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데 직장생활과 가게문제로 아이들을 온종일 맡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 이 지역 맞벌이 부부들에겐 정말 꼭 필요한 곳인 영등포교회 어린이 집은 구청과 협력하여 관인으로 운영된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부모들의 걱정을 덜고 아이들은 부모와 같은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어린이 만큼 영등포엔 노인들도 많다. 영등포교회가 하는 사업 중에 가장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 노인학교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영등포교회 노인학교는 안다. 바쁜 시장 생활 속에서 노인들이 소외되는 것은 당연한 일. 노인학교는 이런 소외감을 덜어주고 노인들에게 새로운 즐거움과 자녀들에게 마음 고생을 덜어주고 있다.

영등포교회는 또한 호스피스 봉사가 유명하다. 매년 호스피스 교육을 통해 수십명의 호스피스를 배출하고 이들은 지역의 병원과 양로원,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말벗도 되어주고 봉사 활동을 펼친다. 이와 함께 해마다 지역의 65세 이상 '어르신'들을 초청, 어린이 집 어린이들의 수화찬양, 노인학교 교사들의 민속공연, 레크리에이션 및 오찬 등으로 교제를 나누는 지역어른초청잔치를 가지며 지역사회 독거노인, 장애인과 소년소녀가장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김장김치 담그기도 실시한다. 이렇게 담가진 김치는 지역의 2백여 가정에 맛있게 배달된다. 이와 함께 영등포교회엔 방지일 원로목사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청소년들의 꿈을 위한 장학회'가 있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지역 중고대학생들을 위해 교회 출석과 연 2회 장학금을 지급한다.

현재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1백주년 사업 중에는 아이들의 공부방, 다채로운 문화교실 등이 있다. 무언가 배우고 싶지만 시간이 없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 특히 시장을 떠날 수 없는 시장 주민들에게 여유로움과 새로운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김,목사는 교회 창립 1백주년을 맞이하며 "과시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업들을 통해 내실을 기하고 싶다"며 소박하게 말했지만 그 옛날 옹기마을이었던 영등포, 그곳의 옹골찬 교회로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hcahn@kidokongbo.com

 


◈ '진흙의 땅에서 복음의 옥토로'
 한 세기 전, 영등포 일대는 별로 쓸모 있는 땅이 아니었다. 사방천지가 진흙 투성이라 '진등포'라 불리울만큼, 오죽하면 "부인없인 살아도 장화없인 살 수 없는 곳"이란 오명을 썼을까. 제물포에서 서울로 오는 길은 고척-도림-신길-대방-노량진 길로 가고, 강화도에서 오는 길은 양화진-잔다리를 건너 아현을 넘었다. 따라서 영등포는 그 어디에도 거쳐지지 않는 변방이었던 것이다. 그런 영등포가 한국 근대사에서 두드러질 수 있었던 것은 철도때문이었다. 경인선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영등포는 그 분기점에 있던 한반도 최대의 신흥도시가 된 것이다.
 
새로운 도시 영등포는 당연히 선교의 촉수를 건드렸다. 선교사들의 빈번한 왕래와 함께 몇몇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새문안교회의 영향을 받았고 주일이면 배로 건널 수 있는 잔다리교회(현 서교동교회)에 다녔다. 1900년을 전후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성도들이 늘어나자 영등포에 독자적으로 예배처를 구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지도하였고 드디어 1903년 3월 1일 주일 영등포교회의 이름으로 첫 예배를 드렸다.

 척박한 땅에 세워진 영등포교회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학교를 세우고 신 문물에 대한 모든 접촉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영등포교회는 1920년대에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희년 이후 영등포교회는 제2의 성장기를 맞았다. 그것은 방지일 목사(전 총회장)의 목회기간과 일치한다. 전반기가 양적 성장이었다면 후반기는 영적 심화기라 할 수 있다. 영등포교회가 근대성을 버리고 현대적 목회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방지일 목사의 가장 성서적이고 복음적이고 원칙적인 목회, 그 정신은 방목사의 뒤를 이은 김용호 목사와 현 담임 김승욱 목사로 이어져 1백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영등포교회는 또 다른 복음의 확장을 꿈꾼다. 그것은 지역과 하나됨이다. 1백년 전 영등포교회의 창립정신은 '지역 복음화'였다. 창립 1백주년을 맞은 영등포교회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1백주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지역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것은 한세기 전 믿음의 선진들이 내건 복음화를 이제 섬김과 나눔으로 펼쳐가는 것이다. 


제 109회기 총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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