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록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이비 이단에 대한 기록은 '안식교'이다. 당시에는 '예수재강림제7일안식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꺼번에 40명의 교인이 이 '안식회'로 옮겨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 거리였다.
지금은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통칭 '안식교'라고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안식교'보다는 '안식일교'라고 불리우기를 원한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자기들을 특징을 부각시키려는 것과 기성교인들과 '토요 안식일' 문제의 쟁점을 유도해 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안식교의 안식일 문제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조선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발행한 {신학지남}에 안식교를 비판하는 글이 지속적으로 실리는 것을 보면 안식교의 도전이 거센 상황이 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제 4회 총회(1915년)에 경기충청노회에서 '예수재강림제七일안식회라는 회에 유혹을 받아 그 교회 교리를 옳다는 자도 있고 그 회로 가는 자도 있는데 그 교우를 어찌 처리하여야 좋을런지' 묻는 헌의를 했다.
총회의 결의와 지침은,
① 그 교회 교리가 옳다하는 자에게 대하여는 그 당회가 권면하고 만일 직분 있는 자에게는 권면하여도 듣지 아니하면 면직시키기로 하오며 ② 그 교회로 가는 자에게 대하여는 그 당회가 강권하여 보아서 종시 듣지 아니하면 그 당회가 제명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오며
라는 정치위원의 보고를 그대로 채용했다.
이 결정은 차후 사이비 이단에 대한 지침의 모본이 되는 데 아마도 디도서 3장 10절의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는 말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상노회가 제 5회 총회에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특별한 사건으로 '울릉도의 40명 교인이 안식회로 갔사오며'라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는 등 상당한 후유증을 겪은 모양이다. 1915 ~ 6년 당시의 교인 40명이라면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제 5회 독노회록에서도 안식교의 기록이 발견되는데 남평안대리회의 보고서에 '각 교회가 다른 교회와 상관된 것은 천도교 자유회 안식회이오며'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후 내용은 기재될 제 80회 총회보고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