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최초의 한인 선교사 최관흘의 선교 교훈
정호상 선교사
1. 서론
최관흘 선교사는 1909년 평양 신학교를 2회로 졸업하고 한국 교회가 함께 외국으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올해는 100년이 되는 해이므로 우리는 10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하고, 그의 선교사역을 돌아보고 그의 사역을 돌아 보고자 한다.
최관흘 선교사에 대한 자세한 활동 상황은 필자의 부족한 논문 “최관흘의 생애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 선교 연구”을 참조하기 바라며, 이곳에서는 그의 선교활동이 갖는 여러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
2. 선교사를 보낸 1909년의 한국 교회의 정황
선교사를 보낼 교회는 어떠한 교회이어야 하고,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하는가는 여러 말이 필요 없다. 건강하고 헌신된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고, 또 주님에게 헌신한 사람이 선교사로 가야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보낼 만하고, 나는 선교사로 갈 만한가라고 물으면 우리는 대개 부정적인 답을 하고 만다. 무슨 일인가? 환경을 생각하고 장래의 불안이 선뜻 나서기를 주저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선교사를 보낸 당시의 정황을 알게 되면 우리 교회도 선교사를 보낼 수 있고, 또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가. 한국교회 형편
1883년 솔내 교회를 시작으로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 한 세대도 되지 전의 일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예수에 대한 복음보다는 서양 종교라는 의식이 강했고, 제사를 중시 여기던 유교의 전통이 매우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기독교로 회심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며 공공연히 핍박을 가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매우 폭발적인 성장(1907년 대 부흥 운동)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역자는 턱없이 모자랐다. 특히 1907년에 오래 기다리던 신학교 졸업생을 7명 배출하였지만 2회 졸업생은 학생이 없어 한 해를 쉬고서야 졸업을 시킬 정도였다. 1회 졸업생 7명은 그 당시 조선 팔도에 한 명씩도 배당할 수 없는 적은 수였지만 한국 교회는 그 중에서 한 명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보내기로 하였다. 1909년 2회 졸업생이 8명 배출되자 다시 한석진 목사와 2회 졸업생 최관흘을 선택하여 일본 동경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선교사를 보낸다. 한국 교회는 100년 전 교회가 부흥하고 목사가 많아서 선교사를 보낸 것은 아니다. 목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또 언제 보충 할 수 있다는 기약도 없는 상황에서 선교사를 보낸 것이다.
나. 한국과 주변 국가 정세
두 번째는 당시의 한국(대한제국)은 비교할 수 없이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더구나 1909년은 이미 1905년 을사 늑약으로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 나라였고, 그 다음 해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별망 과정에 놓여 있었다. 이미 일본은 여러 방법으로 식민지 기반을 다졌고, 대한 제국의 우국지사들은 자결을 하거나 독립 운동을 위해 무장 봉기를 하고, 또 좀 더 자유로운 독립군 조직을 위해 외국-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로 나간 상태였다. 참으로 어수선하고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던 때인데도 한국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 경제적인 형편
한국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면서 그들을 세계 강대국에 보냈다. 물론 그들의 생활비를 충분하게 주고 보낸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한국 사람들이 고생하며 근근이 살 수 있는 정도 금액을 후원하면서도 선교사를 보냈다. 그러므로 어려운 국제 정세와 교회의 미약함을 불구하고 선교사를 보낸 한국 교회도 우수하지만 이에 헌신한 선교사들은 더욱 귀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가야하는 먼 여정이었고, 또, 현지어를 배울 수 있는 여유(시간, 혹은 경비)도 없이 사역을 해야 했으니, 선교 범위는 한민족에게 국한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동일 문화권에 선교한 것이니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처음 선교 여행을 할 때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들이 계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반대하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역시 한국 선교사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어떤 형편이던지 한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점점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라. 처음 가는 길
100년 전 한국 교회는 선교 받은 세계 여러 나라 중에 처음으로 외국에 선교사를 보냈다. 당시에는 선교사라면 당연히 유럽이나 미국 등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들만이 하는 시기였다. 실로 유럽의 기독교는 수 세기에 걸쳐 제국주의와 함께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보냈다. 그러나 20세기가 다 되도록 복음을 받은 제 3 세계 교회가 다른 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한 예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복음을 받은 지 불과 30년이 되기 전에 이미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하였고, IMC 1차 대회(1910년)에는 선교사 파송국의 일원으로 에딘버러 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 인도 대표도 참석하였는데 그들은 오직 인도 남부에서 북부로 선교사를 파송한데 비해 한국 교회는 국내로 파송한 것은 물론이고 당시 국제적으로 강대국이었던 일본과 러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교회의 당연한 임무라고 여긴 것이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나라가 된 것은 정치 경제적인 형편을 따져서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 교회도 세계 선교 대열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힘찬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3. 최관흘의 선교 사역이 주는 교훈
가. 적극적인 헌신
최관흘은 1909년 9월 6일에 선교사 파송이 결정되고, 바로 두 달 뒤 11월 5일에 블라디보스톡에서 행정기관에 장로교회를 세우겠다며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기차 길로 간다고 해도 평양에서 출발하여 중국 만주를 거쳐 하얼빈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먼 여정이었다. 채 두 달이 되지 전에 평양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블라디보스톡까지 간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명령에 거침없이 순종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생활은 극히 어려웠다. 최관흘은 월세 낼 돈이 넉넉지 않아 술집 이층에서 살아야 했고, 술을 먹는 사람들을 지나서야 들어 갈 수 있는 2층 방에 살았다. 그리고 중국으로 간 선교사들은 땅을 한자나 파고 지은 토굴 같은 집에서 살아야 했고, 현지어를 공부할 경비가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외국 -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세계에 살면서도 재정도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열정으로 기꺼이 선교사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나. 하나님 선교
최관흘의 선교가 과연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그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행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삶과 신앙의 배경이 제국주의적이고 교회중심적인 선교를 한 것이었다면 이러한 신학의 영향이 최관흘의 삶과 신앙에 깊이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의 삶 속에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몇 가지 행동들에서 하나님 선교를 발견하게 된다.
먼저 자신의 선교 구역을 감리교 영역으로 하자는 그의 의견은 그에게 있어서 복음이 교단보다 더 중요했음을 알려 준다. 단지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해서라면 교단을 포기하려 한 것이다. 최소한 그는 교단이나 자기 교회만을 주장하는 분파주의에서는 떠나 있다.
또 그는 제국주의 선교와는 원천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한국은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나라마저 잃은 때였으니, 국력이나, 재력을 앞세워 선교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정교회를 넘나들때 그의 사역들이 일관성이 있다. 즉, 그는 장로교 선교사로 러시아에 파송 될 때에, 러시아 시베리아(주로 연해주) 지방에 흩어져 고생하며 유리하는 한국 백성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그가 정교회 넘어 가서도 한 일은 한민족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었으며, 다시 장로 교회로 넘어오게 되는 이유도 한인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도하였기에 장로 교회 목사로 다시 안수 받을 수 있었다. 즉, 그는 장로교로 있을 때도 정교회 갔을 때도 변함없이 한 것은 복음을 한인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이지, 교단이나, 자신의 직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선교관은 적어도 교회 중심이거나 교단 중심의 선교나 제국주의적인 선교에서 떠나있고, 하나님의 복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교에서 교단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최관흘에게는 교단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정교회로 넘어 갔을 때는 이미 장로교회 총회가 선교 중단을 선언한 상태였기에 좀 더 쉽게 정교회로 넘어 갔을 것이다. 또, 러시아의 정치 종교적인 상항이 총체적인 중단을 요구했었기에 러시아 정교회로 넘어가서 선교를 계속한 것이었다. 정교회가 힘을 잃자 그는 곧바로 장로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열심히 전도하면서 장로교회 교단으로 돌아 온 것은 교단이나 교회가 선교에 있어 하나님의 동역자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관흘의 중심에는 복음을 들어야만 하는 한인들에 대한 관심이 그를 연해주에 머물러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러시아 정교회로 넘어 간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교에 동역자로 헌신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선교 활동은 지상 교회가 아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공동의 증언
공동의 증언에 대한 문서들이 지난 30년 동안 교회 공식 문서로 나왔는데, 다양한 선언들이 지향하는 것은 ‘일치의 결핍’은 주님의 표현 의지에 거스리는 것이고, 공동의 증거가 정통적 선교 활동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에 대해 두 가지 신학적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세례가 이미 하나이듯이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례로 하나가 되었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함께 부름을 받았다. 또 하나님은 신비, 말씀, 성령으로 서로가 동등하고, 서로 서로 안에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증언하며, 인류를 주님과 함께 하도록 초청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공동의 증언을 할 수 밖에 없다.
1993년 로마 카톨릭의 “에큐메니칼 훈령집”은 교회가 새로 시작되는 지역에서 특히 불일치하는 교회가 이식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함께 일해야 한다고 했다. 마닐라 선언은 세계 복음화의 과제가 언젠가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함께 세계 복음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부끄러운 ‘양 빼앗기’를 하고 있지만 그런 행위가 복음에 영감 받은 것도 아니고, 교회의 인가를 받은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보쉬는 그의 책 “변화하고 있는 선교”에서 공동의 증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했는데, 선교와 교회의 하나됨은 결코 대립되지 않으며, 획일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 다양성을 보존한 통일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다양성이며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했다. 그는 또 연합하여 선교하는 것을 질적인 것으로 이해했고, 파송하는 교회와 받는 교회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개교회주의나 인종적 차별을 강조하는 새로운 교회의 이식을 분명히 반대하면서 호켄다이크의 말을 빌어 ‘공동 역사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것이 이단의 본질이다’고 말한다. 공동 증언은 교회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섬기는 것이다. 공동의 증언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를 추구하며, 교회의 통일성의 상실은 고통이 아니라,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더러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이 우리는 하나로 부름 받았다.
최관흘 선교사에게는 다른 교단 즉, 감리교회나 정교회 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요 한 지체였다고 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에 그가 선교하기 전부터 감리교회도 나름대로 조직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감리교회와 중복 되어 일하는 것 보다는 자신의 사역지를 감리교회에 넘기고 자신은 다른 곳을 찾을 양으로 총회에 건의 하였다.
정교회는 최관흘의 선교 활동을 방해하고 그를 추방하려 하면서 한편으로 그를 회유하여 정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려했다. 연해주에서 모든 선교사들과 권서인들이 추방되었을 때 최관흘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국가에 해를 끼치는 외국인이란 죄목으로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한국 교회는 그를 후원을 중단하면서, 철수 명령을 내렸고, 정교회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러시아 정교회 신부 오가이 봐실리를 통해 접근하여 마침내 정교회로 데려가게 된다. 정교회에 간 후 최관흘은 정교회 속에서 장로교 선교사가 마당히 할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장로교회를 세우는 일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일을 한 결과 장로교회가 세워 지는 것이 아니라 정교회가 힘을 얻어 간다고 해도 백성들이 성경을 더 깊이 알고 구원의 도리를 안다면 장로교회 혹은 정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교단 중심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지체로서 감리교회나, 정교회를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다른 교단과 협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 소명
많은 한국교회와 많은 이들이 최관흘을 평가하면서 배교, 개종이란 말을 사용한다. 먼저 개종과 회심은 선교학에서 매우 큰 논쟁거리가 되는데, 회심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서 자발적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라면 개종은 여러 가지 동기에 의하여 종교를 바꾸는 경우를 말한다. 회심이 선교사의 의도대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면 개종은 전하는 자의 의도대로 만들어지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선교에서 회심이 그 원인이라면 개종은 그 결과이다. 개종이 사고와 행동 체계의 변화라면, 회심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회심이 하나님과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개종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또는 문화적 동기에 의하여 유도된다.
그렇다면 최관흘이 정교회로 간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먼저 정교회로 개종한 것인가? 개종은 종교가 바뀌어야 하는데, 정교회나 장로교회는 다 한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성경을 사용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다, 종교가 바뀐 것이 아니라 교단 혹은 교파가 달라 진 것이다. 그러므로 배교라는 말도 전혀 적당한 말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면 최관흘이 정교회로 간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유대교에서 개종이나 회심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부르심에 응답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쉬의 견해이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을 제외한 바울 자신의 글에서는 사도적인 소명에 더욱 강조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갈2:11-17, 빌3:2-11, 롬 7:13-25) 최관흘이 정교회로 간 이유를 “최 목사는 러시아 교회와 연합함으로써 그의 백성(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위한 사역을 더 잘할 수 있다고 느껴서 (정교회와 연합)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최관흘 목사가 정교회로 간 것은 강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외압이 있었다고 해도 한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글과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은 그를 한국 교회가 파송할 때, 파송 목적이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러시아에 선교사로 온 목적이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한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방법을 찾는 것은 선교사로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선교 구역이기도 하고 근거지이기도 한 블라디보스톡을 감리교 구역으로 하자는 제의를 한 것도 이와 같은 선교의 효과라는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정교회에 넘어 가서도 그의 사역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신부)가 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정교회 교리문답사가 되었는데, 이는 장로교회의 순회 설교자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정교회에서 한 일을 간추리면, 새로 정교회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르쳤는데, 죄 용서, 구원, 십자가의 도, 성경과 기도에 관한 것을 주로 가르쳤다. 또 한 지역에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청하는 대로 달려가서 이것들을 가르쳤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는 며칠씩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하며 쉴 시간도 없이 계속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최관흘이 정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 보다는 정교회가 그로 인해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는 장로교 목사나 설교자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하고 있는 모습이나, 세례 공부를 위한 학습 제도를 정교회에 만들게 했고, 세례를 받기 전에 성경을 반드시 읽게 하거나 세례를 ‘한국어를 아는 교리 문답사(최관흘)의 신앙 지도 없이는 줄 수 없게 한 것이라든지, 세례식을 특별히 일 년에 두 번 농번기를 피하여 온 마을의 축제처럼 하게 한 일 등을 생각하면, 최관흘의 영향은 정교회에서 지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관흘이 정교회로 간 것은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정교회의 옷을 입은 것이었고, 그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교회를 세례만 베풀던 개종 중심의 안이한 선교에서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회심을 강조하는 선교로 관점을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최관흘이 정교회와 연합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소명을 위한 결단이었다.
4. 결론
최관흘의 삶은 100년 후의 오늘에도 많은 도전을 한다.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회는 100년 전의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갈가리 찢겨진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도 없지 않다 할 것이나 우리 교회의 아픔이요 한 분 하나님 앞에서 죄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최관흘은 감리교회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자며 블라디보스톡을 감리교회 선교 구역으로 넘기자고 했고, 정교회와 연합을 통하여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버리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에큐메니칼을 부르짖으면서도 교회는 나뉘어 있으며, 더욱 자기 교파 위주의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최관흘의 교회 연합 정신이 구현된 삶은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라고 한국 교회에 강하게 도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관흘이 정교회로 넘어 간 것에 대해 쉽게 단죄하지 않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개종한 배반자라고 비난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하나로 유지하는데 얼마나 노력하고 있나 반추해야 할 것이다.
최관흘이 정교회로 넘어가게 된 동기가 당시 정교회의 핍박과 정부나 경찰을 동원한 철저한 압제가 원인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현재 러시아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자기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른 교회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의 모습으로 공동의 증거를 해도 세계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데, 주 안에서 하나 된 교회끼리 서로 비난하고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국에서 러시아로 와서 선교하는 선교사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손님 접대를 기뻐하는 러시아의 정신(Русская душа)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렇게 한다면 개신교 선교사들도 적극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와 연합을 모색하리라 여겨진다.
블라디보스톡 동부교회 목사 정호상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