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 1917-1937년까지 장로교회와 복음교회 상황
정호상 선교사
1. 1917년 - 1922 복음 운동의 확산
1917년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그 무엇보다도 종교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장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러시아 정교회였다. 재정의 근간이었던 국가가 무너지면서 정교회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이 갑자기 끊어졌고, 러시아 정교회는 매우 빠른 속도로 허물어져 갔다. 물론 아직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고 하지만 많은 정교회 사제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성직을 포기하였다. 1918년 정교회 기관지는 짧은 지면으로 발행되었고, 거의 모든 지면이 여러 신부 해임명령을 빼곡이 기록하였을 뿐이었다. {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ЕПАРХИАЛЬНЫЯ ВЪДОМОСТИ(블라디보스톡 주교구 통보지), 1918년 1-2월(1-4호), 4쪽. “1918년 1월 16일자 55호에 의거하여 까르싹꼽스키 교회 성직자 오 봐실리의 요청대로 1918년 1월 16일부터 직위 해제하노라. 등등”}
그런데, 정교회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회주의 혁명은 복음교회와 장로교회에는 반대로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조직적인 반대로 복음전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제 그 막강한 반대 세력이 갑자기 힘을 잃게 된 것이다. 또 한편 무신론 정권을 표방하는 사회주의 정권은 아직 연해주에는 힘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확대하다가 지금의 스파스크 달리 지역에서 남쪽은 황제군이 포진하고, 북쪽은 적군이 포진한 전선이 장기간 정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22년 빨지산들이 그 험한 산맥을 넘어 당시 수청지역을 접수함으로 공격의 활로를 트고 연해주의 남부 지역을 점령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수청을 빨지산스크 시로 명명하게 되었으며, 연해주이 수도인 블라디보스톡 중심 광장에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빨지산 들의 동상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서 있다.
침례교 선교사들이 수장되었던 끄라스끼노 앞 바다의 위성 사진 : 왼쪽 하단은 두만강 하류, 상단은 중국 연변과 이어져 있는 곳이다. 러시아 침례교회를 비롯한 복음운동도 많은 약진이 이 기간에 있었으나, 이 소논문에서는 한국교회와 관련된 부분만 살펴 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보내거나 현지 성도들을 중심으로 열심히 전도하여 각 마을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 부속 학교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 단지 연해주에 있던 성도들의 활동이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침례교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동아 기독교는 1918년 10월 20일에 4명의 선교사(박노기 목사, 김희서 교사, 김영태 총찰, 최응선 감노)를 파송하였으나, 러시아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한 채 포시엣 항구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겨울 바다에서 죽고 말았다. 이들을 땅에서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은 풍랑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려 흰옷을 입고 온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을 치뤘고, 이를 본 사람들이 많이 주께 돌아왔다고 했다.
장로교회는 함북 노회를 중심으로 러시아 연해주를 탐방하고 선교 상황을 보고하고, 또 선교사를 파송하였지만 결과는 고작 6개월 그리고 철수하고 만다.
그렇다고 해도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때 최관흘씨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교리문답사를 그만 두고 장로교회 총회에 편지를 보내 러시아 선교를 독려하면서, 자신은 알아주던지 말던지 아랑곳 없이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 결과 그는 다시 장로교회 목사로 임직을 받게 되었고, 복직이 된 최관흘 목사는 내수청지역(지금 연해주의 빨지산스크)에 있는 우지미 교회로 청빙되었다.
이렇게 현지 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전도하여 1921년에는 감리교회가 시베리아 연회를 조직하였고, 이어서 1922년 장로교회도 시베리아 노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2. 각 교단별 교회 통계들
1) 침례교회 통계
연추(현 끄라스끼노) 구역수청(빨찌산스크) 구역해삼위(블라디보스톡) 구역교회 명교인 수교회명교인 수교회명교인 수달미교회160치머우교회40해삼위교회120장서재교회130한흥동교회200친거우교회110연다우재교회90흥미지교회70세치재교회160태이성 교회200새재렌교회30시다이가교회100지세이교회100으르싯쓰교회30우글리 교회40외나무정 교회40그분예산교회50신흥동교회150허가동교회85남석골 교회70남흥동교회170시지미교회40시영구교회200아지미교회70발누에교회70도빙허 구역둘레미교회30상서현교회100도빙허교회포셋트 교회50북상서현교회130신항동교회느블미교회30금점동교회25대한동교회극동교회60우지미교회40대흥동교회강으재교회60다리목교회40연추교회30대진교회70황거주재교회60창제동 교회170
2) 감리교회 통계
지방
년도블라디보스톡
지방니꼴스크
지방노오끼엡스크
지방계192319251923192519231925192319251928목사22111144남전도사54435414118여전도사232212576권사64561292319속장433443285945145107교회362421185030107726교인14186397543781292793346418101011연보(원)17868532479126117861402605235163449
3) 장로교회 통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 11회(1922년 9월 15일) 회록 94쪽을 보면. “시베리아에 로회가 분립하게 된 일이오며, 최관흘씨는 함북 노회에서 복직함을 받고 로회 회원으로 환영하는 동시에 내수청 지방 교회에 목사로 청빙되었사오며, 아령 부흥회 시에 로국 사람이 큰 감동을 받고 희랍 교인과 천주 교인이 개신교로 돌아오고 우리 조선 교회를 특별히 앙모하오며.” (101-105쪽)노회가 분립할 때의 시베리아(연해주) 지방의 교회 형편을 보면, 해삼위 지방에 5개 교회에 목사 1인, 장로 4인, 영수 3인, 집사 11인, 예배당 1개처소, 교인 533명, 외수청 지방에 5개 교회에 장로 1인, 영수 2인, 집사 7인, 예배당 1개처소, 내수청 지방에 18개 교회에 장로 2인, 영수 4인, 집사 19인, 예배당 5개 처소, 고로지개 지방 9개 교회, 우수리 지방에 4개 교회, 하바롭스크 지방에 3개 교회, 남부 우수리 지방에 9개 교회 분중하유 영지 7개 교회가 있었다. 총 합계 목사 1명 장로 7인, 영수 21인, 집사 67인, 교인 2970인으로, 59개 교회와 8개의 예배당이 있었다.
동아 기독교의 1925년 통계를 보면 4개 구역에 총 43개 교회에 총 교인이 3620명이 있었다.(25년 시작한 교회는 1개였고, 그 외는 다 23년 이전에 시작된 교회였다). 감리교회의 1923년 통계를 보면 목사 4명, 남녀전도사 19명, 교회 107개, 교인 3464명이었다. 장로교회는 목사 1명, 장로7인, 영수21명, 59개 교회, 2970명으로 집계된다. 이 모두를 합하여 한국교회가 연해주에서 1923년까지 이룬 선교 통계는 209개 교회, 교인이 총 10054명이 있었다. 이를 다시 음미해보면 연해주에 한인이 있는 마을은 다 교회가 있었거나 두 개이상의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르게 본다면 당시 연해주에 한인이 총 100,000명이 살고 있었다면 그 인구 중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반도 내에서 기독교 인구가 겨우 1% 미만을 헤아릴 때 연해주에서 이런 엄청난 결과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3. 1923년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된 후 교회 상황들
물론 20년대 혹은 그 이전에라도 홍건적이나, 홍마적, 청년 공산당원들의 공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23년 러시아 전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 된 이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단회적인 빕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23년부터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 되자, 즉시 감리교회 시베리아 연회, 장로교회의 시베리아 노회는 더 이상 모일 수 없게 되었다. 1921년에 창립된 감리교회의 시베리아 연회는 22년에 한번 모였고, 장로교회 시베리아 노회는 1922년 분립 이후 한번도 모이지 못한 최 단명 노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교회들도 다음에 예를 든 블라디보스톡 장로교회의 수순을 따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 임대 계약
1923년 7월 17일에 연해주 주지사 실행위원회는 이미 신한촌에 있던 장로교회 건물(체레파높스키 거리 21번지)을 법적으로 차지하고 임대계약서를 작성한다. 이 임대 계약서는 무기한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만, 장로교회가 오래 전에 교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사회주의 법에 따라 공공 재산으로 환수 한 것이다. 이 계약서는 건물외에 강대상, 긴의자, 화덕, 옷걸이, 장작 패는 도끼까지 포함한 모든 재산 목록을 첨부한 것이었다. 이 계약서를 러시아 공민이거나, 거주권을 가진 사람들 30명이 서명했고, 총 감정가는 건물 300루블, 동산 64루블 80 까페이까였다.
2) 임대 계약 종료하거나, 다른 기관에게 임대를 줌
1926년 1월 19일 블라디보스톡 시 위원회는 종교 건물을 검사하고, 그 결과 철재 화덕이 보이지 않고, 대신 목록에 없던 나무탁자 1개, 4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 5개, 갓이 있는 유리 램프, 나무 차단 벽, 강대상 등이 있었고, 이를 다시 목록에 기록하여 공동 소유로 삼고, 다시 임대하였다. 또, 장로교회 건물은 매우 춥고, 균열이 가고, 천장에 눈이 새고, 무너져 가고 있어서, 예배 드리기가 부적당하다며, 1주간의 여유를 주어 그 집을 비우고, 임대 계약서에 기록된 모든 재산 목록을 포함하여 주지사의 인민 교육 부서에 그대로 돌려 주라고 했다.
감리교회(세울스카야 거리 7번)는 돌로 된 2층 교회였는데, 23년 8월 23일에 처음 계약을 채결하고, 동년 9월 23일 콤소몰스크(공산 청년 연맹) 그룹에 긴의 자 20개를 함께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었다가, 29년 11월 29일에 제2번 9학년 학교에 임대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가난한 어린이 2번 기숙학교에 넘겨주었다. (이 판결 문서에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ГАПК, Ф.86, ОП.5, Д.1, Л.30)
3) 교회 지도자 숙청
교회 지도자를 숙청하거나 외국으로 추방하여 교회들은 하나같이 스러져갔다. 30년을 전후해서는 러시아의 정교회나 러시아 침례교회도 다 문을 닫아야 했다. 하바롭스크의 한 복음 침례교회의 형제(Лебедев В. Т. 75세)는 저자와 면담에서 말하기를 역시 소문임을 전제로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각 교회 지도자를 열차에 실어 아무르주로 열차로 이송 하던 중 천길 낭떠러지에서 열차가 고장이 나서 서 있다가, 낭떨어지에 열차가 떨어졌다는 말을 했다.
4. 간간히 이어지는 교회의 소리들
1930년대는 거의 모든 교회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단지 전도 부인 한가자씨가 교회를 돌본다는 기사가 가끔 한국 총회에 보고되는가 하다가 곧 이마져 소식이 끊어지고 만다. 더구나 1937년 스탈린이 일본과 전쟁을 준비하면서 연해주에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그나먀 남은 교회의 흔적마져 다 지워버렸다. 또, 블라디보스톡이 확장되면서 그 흔적을 찾아가는 것은 건물이 서 있던 곳의 땅만 확인하거나, 이마져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다.
블라디보스톡 동부교회 목사 정호상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