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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31주기 기념예배 및 고 문용동 전도사 순교기념예배 열려

관리자 2011-05-18 (수) 14:51 13년전 2458  


“바보 영성으로 바보 예수를 따라간 선배처럼, 우리도 바보가 돼 예수님을 따릅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1주기를 하루 앞둔 17일, ‘광주의 마지막 희생자’이자 ‘유일한 목회자 희생자’였던 문용동(1953∼1980) 전도사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재조명하는 추모 행사가 열렸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인권위원회와 호남신학대학교 총동문회 주최로 호남신대 대강당에서 열린 ‘5·18 31주기 기념예배’ 자리에서다.

‘바보 문용동 선배님’이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전한 광주노회 인권위원장 장헌권 목사를 비롯해 참석자들은 그를 ‘순교자’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총회 인권위원장 홍승철 목사는 “그분의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 순교자적 신앙이었다”고 했으며, 문 전도사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산월교회 윤상현 목사는 “그와 같이 정의를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배를 마친 참석자들은 광주 운정동 ‘국립 5·18 묘지’로 이동해 문 전도사 묘소에 참배하고 당시 희생자들의 유족과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민주화 및 인권 개선을 위해 기도했다.

문 전도사에 대한 교단 총회 차원의 추모식은 올해로 겨우 두 번째다. 이는 고인이 사회와 교회 속에서 받아 온 여러 갈래의 오해와 편견 때문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5·18 희생자’라는 점을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정부 기관원(프락치)이었다’는 누명으로 광주 시민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도청 무기고 관리를 담당했으며 마지막 순간에 폭발물의 뇌관을 제거했다는 이유에서다. 때문에 1990년대 들어 다른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가운데서도 그의 이름은 하나의 ‘금기’로 통했다.

그러다 그가 남긴 일기와 주변 증언이 공개되고 동문과 후배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2000년에야 호남신대는 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문 전도사는 80년 5월 18일 교회를 다녀오던 길에 공수부대원에게 맞는 노인을 돕다가 함께 폭행당하면서 다음날부터 매일 시위에 참여했다. 22일에는 도청에서 결성된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 지하실의 무기관리 임무를 맡았다. 이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서른두 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당시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무기고 안에 있던 수만 발의 탄약과 3000여 상자의 다이너마이트가 잘못 터지면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는 판단으로 뇌관 제거에 나섰고, 그 후로도 “내가 죽으면 태극기로 덮어 달라”는 말과 함께 현장을 지켰으며 마지막 순간에 투항하려다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동문들이 뒤늦게 나서 2001년 학교 한쪽에 세운 작은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새겨져 있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 국민일보 황세원 기자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3-03-31 15:38:07 총회주간일정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3-03-31 15:40:00 총회주간일정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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