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일제의 장로교회 탄압
한일병탄 이후 총독부는 한국교회를 식민지 동화정책의 큰 위험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국제적 관계망을 가지고 있고 외국 선교사가 관계하는 한국교회를 물리적으로 직접 탄압하는 것은 어려웠다. 일제는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교묘히 교회를 탄압했는데 첫째로 ‘개정사립학교 규칙’을 통해 기독교 사립학교들을 무력화하고, 둘째로 ‘포교 규칙’을 통해 교회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하고, 셋째로 교회 지도자들을 고문해서 총독 암살모의 혐의를 조작해 탄압했던 105인 사건이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 1차 대상은 장로교회였다.
나. 3·1운동 참여
3·1운동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염원하는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기독교인들은 3·1운동의 준비과정, 점화단계, 전국적 만세운동의 진행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임시정부와 국내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일제의 민족 탄압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했고, 또한 기독교인들은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운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장로교회는 3·1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당시 서울에 뿌려진 ‘독립단통고문’에는 기독교의 평화적 비폭력 저항운동이 3·1운동의 기본정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립단 제군이여 무슨 일을 하던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치지 말라. 이는 야만인의 하는 짓이니 독립의 중심 뜻을 손해나게 할 뿐인즉, 각자 주의 할 일이다. 신도는 매일 3시에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고 매일 성경을 읽되 일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면 읽을 것이다.”
다. 3·1운동 준비과정의 기독교 지도자 24명 성명(연령 교직·직책 기타소개)
*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길선주(52 장로교 목사 평양 장대현교회)
*김병조(44 장로교 목사 3·1운동 발발 직후 상해로 망명)
*양전백(51 장로교 목사 선천 북교회, 증경총회장)
*유여대(42 장로교 목사 의주동교회)
*이명룡(48 장로교 장로 덕흥교회)
*이승훈(56 장로교 장로 정주 오산교회, 오산학교 설립자)
*이갑성(22 세브란스병원 직원 세브란스병원교회 집사)
*김창준(31 감리교 전도사 종교감리교회 전도사)
*박동완(35 감리교 전도사)
*박희도(31 YMCA 간사 종로감리교회 전도사)
*신석구(46 남감리교 목사 수표교교회)
*신홍식(49 감리교 목사 평양 남산현교회)
*오화영(41 남감리교 목사 종교감리교회)
*이필주(52 감리교 목사 정동제일교회)
*정춘수(45 남감리교 목사 원산 상리감리교회)
*최성모(47 감리교 목사 해주 남본정교회) 함태영(48 장로교 장로 휴직 판사,
세브란스병원교회)
안세환(28 평양야소교서원 총무 105인 사건 옥고, 장로교 신도)
현상윤(28 중앙학교 교사 장로교 신도)
김세환(32 수원 삼일여학교 학감 감리교 신도)
정노식(30 무직 장로교 신도, YMCA 회원)
김도태(29 명신학교 교사 장로교 신도)
김지환(29 남감리교 전도사 개성 남부교회, 관서학원 신학교졸)
김원벽(27 연희전문학교 3학년 장로교 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