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연합운동과 국제교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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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합운동
(1) 조선주일학교연합회(1922)
장로교 총회는 총회 산하 종교교육부의 사업을 주일학교연합회의 사업과 연계시켰다. 이 사업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주일학교의 교재(보통공과, 계단공과)를 편찬하고 어린이 찬송가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2)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
내한(來韓) 선교사들은 1905년 한국에서 하나의 단일 개신교를 탄생시키고자 ‘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했다. 공의회는 “선교사업에 서로 협력하고 궁극적으로 단일 개신교를 조직한다.”는 목표에 따라 ‘대한예수교회’라는 명칭을 미리 정해 놓았다. 그러다가 이 공의회는 여러 가지 사정상 그 목표를 단일 개신교 수립에서 개신교 교단들의 상호협력과 연합사업으로 낮추고 1911년 새로운 ‘공의회’(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조직됐는데(1924), ‘예수교’는 1905년에 가졌던 ‘단일 개신교’의 목표였고, 또 ‘공의회’는 이제까지 실시해 온 상호협력과 연합사업을 지속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5년 국제선교협의회(IMC)에 가입했고 이 공의회를 통해 한국 개신교 교단들이 해외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송하며 세계 교회와 교류했다.
2) 해외 한인장로교회
(1) 일본
1920년대에 일본에는 재일(在日) 한국인으로 구성된 한인교회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한인교회가 1909년 동경에서, 1917년 요코하마에서, 그리고 1918년 고베에서 창립됐다. 고베 교회가 1920년에 한국의 장로교 총회에 목회자를 청원하였는데, 총회는 이 일을 경남노회에 맡겼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2년 ‘재일본조선기독교회’의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 헌법에 따라 동북지방중회(東北地方中會), 관동(關東)지방중회, 중북(中北)중회, 관서(關西)중회, 서남(西南)중회 등 다섯 중회(장로교의 노회에 해당)를 조직했다. 1934년에는 이 다섯 중회를 기반으로 ‘재일본조선기독교대회’(在日本朝鮮基督敎大會)를 창립했다. 이 교회들은 우리말(한국어)로 예배드리며 한인들로 하여금 민족정체성을 지키게 했다. 1941년 6월에 일본이 종교단체법에 따라 일본기독교단을 창설했고, 재일본조선기독교대회는 일본기독교단에 흡수됐다.
(2) 만주
1923년 총회(제12회) 산하 만주 지역 노회는 남만노회, 간도노회, 의산노회, 산서노회, 서백리(셔비리아)노회 등이었다. 평북노회에서 분립된 의산노회가 봉천(지금의 심양) 지역 선교에 힘써서 1935년 10월에 의산노회에서 분립된 봉천노회가 조직됐다. 안동현 지역의 교회들이 같은 해(1941) 의산노회에서 분립하여 안동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의산노회와 봉천노회가 남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 1941년 12월에 남만주 지역 한인교회들이 봉천노회로부터 분립하여 화북노회를 조직하였다. 평북노회와 이웃해 있는 용천노회는 만주의 영구 지역에 집중적으로 선교해서 1940년 9월 영구노회가 조직됐다.
총회는 1920년 남만주 지역의 교회들로 하여금 산서노회에서 분립한 남만노회를 조직하게 했다. 남만노회는 북만주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한 결과로 1931년 북만노회가 조직됐다. 간도 지역 한인교회들이 1921년 토성보교회에 모여서 함북노회로부터 분립된 간도노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 간도노회는 그 이름을 동만노회로 바꿨다. 이후 만주의 장로교회 노회들은 일제에 의해 1942년에 ‘만주조선기독교회’로 통합됐다.
(3) 중국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는 상해에서 시작됐다. 남경에서는 1922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인교회가 설립됐다. 북경에서도 1923년 한국인을 대상으로 김광현 목사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 북경의 한인교회가 총회에 전도목사 파송을 요청했는데 재정여건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만주 의산노회의 여전도회가 이 교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중국 청도를 중심으로 한 산동지역에서는 총회 파송선교사들 이외에 여러 한국인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했다.
(4)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러시아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한국인 선교는 1909년 장로교 독노회가 최관흘(崔寬屹) 목사를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파송하면서 시작됐다. 장로교 총회는 1918년에 김현찬(金鉉贊)을 시베리아 전도목사로 파송했고 1920년 장로교 총회에 보고된 교세는 세례교인 352명, 학습교인 248명, 원입교인 187명이었다. 러시아의 공산화 이후, 공산당의 종교(기독교) 탄압으로 시베리아노회는 소집조차 불가능해졌고 총회는 시베리아노회를 폐지했다.
3) 해외 선교와 국제교류
1920년대 후반 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해외의 원주민(토착인) 선교이고, 또 하나는 해외로 이주한 한국인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였다. 총회의 조직 또한 1924년에 국외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전도부’와 외국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외지 전도부’로 나눠졌다.
(1) 만주와 몽골
1937년 4월에 장로교 총회가 만주와 몽골 선교를 위해 최혁주 목사를 파송했다. 장로교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만주로 파송한 김순호가 최혁주와 동역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과 탄압으로 1942년부터 이 지역의 선교가 중단됐다.
(2) 중국
중국의 산동 선교는 한국 장로교가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한 첫 번째였다. 총회는 산동 선교를 위해 중국 교회와 긴밀하게 협력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 계획을 중국장로교회(중화예수교장로회)에게 알렸다. 그리고 총회는 중국 장로교 화북대회에 대표를 파송해 설명했다. 화북대회는 한국 장로교의 선교사 파송을 허락하고 산동성 안에 있는 다섯 현을 조선선교구역으로 배정해 주었다. 한국장로교총회는 이에 박태로(朴泰魯), 사병순(史炳淳), 김영훈(金永勳)을 선교사로 임명하고 1913년 9월에 이들을 중국 산동성으로 파송했다.
중국 산동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까지 세례교인 416명, 신자 수는 515명이었다. 1933년 통계를 보면 세례교인 1,041명, 신자 수는 1,324명이었다. 13년 동안 매년 12%씩 증가했고 세계 장로교에서 가장 빠른 증가율을 보였다. 선교를 시작한 지 20년 만에 한국선교지구 안에 단독노회를 설립했고 선교 30년(1942) 만에 교회 35개, 세례교인 1,756명으로 중국선교 사상 최대의 성과를 남겼다.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총회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중국선교를 활발하게 추진했는데 총회의 해외 선교를 위해 재정지원으로 적극 동참했고 중국, 시베리아, 만주, 일본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여 1930년대 중반에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산동 지역에 김순호, 남만주 지역에 윤정희, 그리고 북만주 지역에 한가자와 유안심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3) 세계 교회와 국제 교류
1920년대 후반의 장로교 총회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통해 국내의 여러 교파·교단 및 기독교 기관·단체들과 협력사업을 벌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5년 국제선교대회(IMC)에 가입하였고, 1928년 3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대회(IMC)에 장로교 교단 대표 정인과 등이 참석하게 했다. 장로교 총회는 1928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김관식(金觀植)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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