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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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회는 1938년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압력을 더 이상 버텨 내지 못하고 굴복했다. 일제는 전국의 장로교회들을 강제로 통폐합시켰고, 종국에는 완전히 해체시켰다. 일제는 여러 개신교 교단을 일본교단에 편입시켜서 일본 기독교로 만들고자 했다. 한국 교회는 이때부터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위해 협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한 신앙인들이 적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불복하며 끝까지 저항한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다.
1) 신사참배 강요
신사참배 강요는 황민화정책의 하나로서 식민지 국민을 전체주의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방편이었다. 중일전쟁과 더불어 황민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일제는 매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이날에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고 국방헌금, 국기게양, 황거요배, 국가제창, 천황폐하 만세 삼창도 강요했다. 또한 일제는 교회를 압박하며 전쟁수행에 협조하도록 했다.
2) 총회의 굴욕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서 참배하기로 결의했고 이후 9월 총회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참배를 결의했다. 총독부는 제27회 총회를 대비하여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유책과 탄압책을 함께 썼는데, 총회 당일 총회장소 주변에 수백 명의 사복경관을 배치하고 사회석 아래에는 평남 경찰부장의 지휘 아래 경관 수십 명이, 회의장 안에는 무술경관 100여 명이 배치됐다. 총회 총대는 전국 27개 노회(만주의 4개 노회 포함) 대표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등 모두 206명이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신사참배 안건에 관하여 가부(可否)를 물었다. 이때 제안자와 동의, 재청한 자를 포함한 몇몇이 “예.”라고 대답했고 나머지 대다수는 침묵을 지켰다. 침묵으로 항거하는 총대들을 향해 일제 경찰들이 일제히 일어나 위협 시위를 했고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은 채 만장일치 가결을 선언했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총회 총대들은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했다.
(1) 전쟁협력
이 무렵에 시작된 태평양전쟁을 위해 일제는 교회에게도 전쟁에 필요한 물자공급을 강요했고 제27회 총회는 국방헌금 모금을 결의하고 그 자리에서 500원을 걷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총회 기간에 총대들은 국방헌금이나 황군위문금을 걷었고 교회는 예배당을 팔아서 없애기까지 전쟁 수행에 협력해야 했다. 일제는 전국 각 면 단위로 1개의 교회만을 남겨 놓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교회의 통폐합으로 비게 된 교회들을 매각해 판매대금을 국방헌금으로 거둬들였다. 일제의 강점기에서 열린 장로교 마지막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전년도에 비해 교회 수가 750개 감소하였고, 교인 수는 76,747명 줄어들었다.
(2) 일본 기독교에 편입된 한국 교회
일제는 한국의 모든 개신교 교단들을 일본 교회에 편입하기로 하고 개신교 교단들이 교파별로 일본의 동일 교파와 합동하거나 혹은 국내 교파들끼리 합동하기 위하여 ‘교파합동추진위원회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교파 대표들 사이에서 신학논쟁으로 교파합동은 결렬되고 각 교파들이 개별적으로 일본 기독교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1943년 5월에 장로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8월에는 감리교가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각각 개칭했고 1945년 7월 19일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으로 통합됐다.
3) 저항과 순교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순복하지 않고 여전도회의 총회소집을 미루다가 1940년 경상남도 여전도회연합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회의를 개최했을 때, 이 자리에서 회장 최덕지의 사회로 신사참배에 불참할 것을 선언했다. 1943년 한국 장로교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칭된 이후, 여전도회연합회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지하로 숨어 버렸다. 주기철, 최봉석, 이기선, 한상동, 이원영, 손양원 등은 신사참배와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저항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고 끝까지 거부한 신앙인들 가운데 50여명이 옥사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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