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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소개 총회역사 설립배경

설립배경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설립배경을 안내해드립니다.

제5장 총회의 회복

01
해방 후
북한의 장로교회

1) 해방정국과 교회의 재건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중심(예루살렘)이었던 평양에서 교회 재건이 시작됐다. 신사참배 강요에 불복(不服)하고 투옥됐던 신앙인 20여 명(이기선<李基宣>, 채정민<蔡廷敏> 등)이 출옥했다. 출옥 교역자들은 산정현교회로 모여 무너진 교회의 재건을 논의했다. 9월 20일 이들은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발표했고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 지도자(목사, 장로)의 ‘통회정화’(痛悔淨化)를 요구했다. 교회 재건과 더불어 노회(老會)도 복구되어야 했는데 이미 38선으로 남북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교회와 노회를 통솔하는 모종의 기관을 잠정 설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1945년 11월 14일부터 한 주 동안 평안북도 선천의 월곡동교회에서 ‘평북6노회교역자퇴수회’(平北6老會敎役者退修會)가 개최됐다. 8·15 해방 잔치를 겸한 부흥회였으나 이 퇴수회에서 북한 ‘5도연합노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했고 일제잔재 청산보다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는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논의됐다. 12월 27일에는 ‘모스크바협정’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대한 강대국의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전국 곳곳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고 북한에서는 조선민주당(조만식) 주도로 광범위하게 반탁운동이 전개됐다.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반탁에 참여했는데 급기야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때부터 반탁운동이 금지됐고 이것을 계기로 북한에서 우익 민족주의 진영이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2) 공산정권과의 충돌

(1) 3.1절 기념예배 사건
북한 전역과 평양의 교회는 광복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감격적인 독립만세기념일(3·1절)을 여러 달 전부터 거창하고도 다채롭게 준비했다. 그런데 인민위원회가 3·1절 기념행사를 교회가 단독으로 개최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오히려 인민위원회의 행사 참여를 종용했으나 교계는 3.1절 기념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이를 통지했다. 2월 26일 평양의 교회 지도자 다수가 구금당했지만 인민위원회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배가 드려졌고 많은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와 신탁통치 절대반대”를 외치며 소련군 사령부로 행진했다.

(2) 토지개혁
1946년 초반에 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을 포함한 10개 실천 강령을 발표했고 또 3월 23일에는 이를 확대한 20개 정강을 발표했다. 지주 소유의 토지는 물론이고 가축·농기구·주택(대지와 건물)까지도 함께 무상 몰수되었다. 지주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반면에 영세 농민은 생활 개선에 필요한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히 조선민주당에 소속된 지주 교인들은 악덕 지주로 내몰리며 체제의 반역자로 압박당했고, 토지개혁과 정치적 압박속에 많은 주민들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월경(越境)하는 소위 ‘월남인’이 발생하게 됐다.

(3) ‘주일 선거 사건’, ‘북조선기독교연맹’ 조직
북한의 장로교회는 공산당 정권과 계속 충돌했다. 공산당 당국은 중요한 행사들을 주일에 거행하며 교인의 참석을 강요했고 또 예배당에서 정치 강연을 했다. 이러한 때에 소위 ‘주일 선거 사건’이 일어났다. 인민위원회는 총선거일 일정을 주일인 1946년 11월 3일로 정해 놓고 이를 강행하고자 했다. 이 선거 일정에 반대한 5도연합노회는 10월 25일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5도연합노회의 결의문이 발표되자, 공산당 정권은 기독교 세력을 강제력으로 꺾을 수 없다고 파악했고 교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도록 유도하기 위해 김일성의 비서이자 과거에 목회자였던 강양욱에게 즉시 이 결의문에 대응하는 기독교 단체(기독교연맹)를 만들게 했다. 기독교연맹은 5도연합노회의 결의문에 반박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남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선거에 솔선 참가한다.” 공산당 정권은 이 결의문을 북한 전역의 교회로 발송했다. 그해 11월 28일에 기독교연맹을 ‘기독교도연맹’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도연맹은 공산당 정권이 주도하는 개혁을 지지하는 기독교 단체를 표방했지만 실제로 기독교도연맹의 주도세력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조했던 인물들이었고 기독교도연맹과 5도연합노회의 대립은 점점 심화됐다.

 

3)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

1947년부터 북한 공산당 당국은 종교(기독교)인의 종교 활동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했다. 기독교도연맹은 평신도의 연맹가입을 받아들였고, 또 면·군·도 단위로 연맹지부를 결성하면서 조직을 확대했다. 1949년 봄부터 기독교도연맹은 북한 전역의 교회 조직을 재편성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마침내 북한 교회의 최대 세력인 장로교회의 5도 연합노회를 해산시키고 직접 총회를 조직했다. 총회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목회자들을 제명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에 평양의 교역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감쪽같이 사라져서 행방불명이 됐는데 공산당 당국이 납치, 연행한 사건이라 짐작된다.
1949년 당시 평양에는 장로회신학교(장로교)와 성화신학교(감리교)가 있었다. 이 두 신학교에 각각 600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공산당 당국은 이 학교를 기독교도연맹 직영으로 하나로 통합시키고 재학생의 수를 축소하고 교수와 학생을 기독교도연맹에 가입시켰다. 그나마도 학생들을 근로봉사에 동원하며 파행적으로 운영하다가 1949년 7월 5일 폐교했다.
02
해방 후
남한의 장로교회

1) 해방정국과 교회의 재건

8월 18일, 장로교회 교역자들이 승동교회에 모였다. 신사참배가 일제 식민지배 세력의 강압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잘못이긴 하지만 그 허물을 청산하기 위하여 “책벌을 논의하자.”는 자리였다. 안동교회 담임목사 최거덕은 그들이 회개하면 이 모든 과오를 불문에 붙이기로 하자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설득했다.

9월 18일 장로교 ‘경남재건노회’가 부산에서 모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죄과를 자숙하는 자숙안’이 상정되었지만 신사 참배에 동참했던 목회자들이 다수인데다 해방 후 이들이 교권을 확보하게 되면서 신앙정화운동은 좌절됐다. 이즈음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됐던 주남선과 한상동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신학교육을 통한 교회 재건’에 착수했다. 당시 총회 산하의 신학교는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무기휴교 이후 서울에 설립한 조선신학교 하나였는데, 출옥 목회자들은 일제 치하에서 설립된 조선신학교가 태생적으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새로운 신학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1946년 6월에 열린 총회(소위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 신학교육기관으로 승인하자 출옥 목회자들은 7월 제47회 경남노회 임시노회에서 새로운 신학교 설립허가를 얻어 내고 ‘(지난날) 평양의 신학교를 계승하는 개혁주의 신학교’라는 기치로 9월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2) 장로교회 노선논쟁

한국전쟁의 초반기 1950년 7월, 경상북도 북부 지역 장로교 경안노회 지역 교회들에서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전쟁이 안겨 준 가장 큰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전쟁 통에 1950년 가을의 수확이 형편없었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심각한 기근이 안동 지역을 덮쳤다. 일본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선교사들이 미국 구호단체 UNCACK(Unites Nation Civilian Assistance Corps Korea)의 지원을 받아 옷가지 50상자와 밀가루 80포대를 급히 가져왔다. 선교사들은 응급조처로 한두 트럭 분량의 곡식(밀, 보리 등)을 사서 무료급식소 다섯 곳을 만들고 날마다 약 5,000명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다. 무료급식소에는 전도용 소책자가 함께 비치됐고, 이곳에서 간단히 예배가 드려졌다.

경안노회는 이러한 긴급상황에 대처하고자 후생부를 만들었다. 후생부는 1951년 12월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 선교부와 미국의 구호단체를 통하여 입을 것(옷)과 먹을 것(식량)을 얻어 와서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경안노회 제51회 회록」<1952.5. 6>). 전쟁 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살핀 경안노회는 고아원을 설립했다(경안신육원) 수많은 전쟁미망인들을 돌보기 위해서 ‘기독자매원’을 설치했다.

 

3) 군목제도의 신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위로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무장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때 미군 제33사단 제10공병대대에 카투사로 참전했던 한 한국인 사병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 통의 진정서를 보냈다. “성직자가 군에 들어와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가슴에 신앙의 철판으로 무장시키고 기도로 죽음의 두려움을 없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편지글이었다.54) 이 편지글이 계기로 작용하여서 군종제도의 설립에 가속도가 붙었다.

1950년 12월 21일 대통령 비서실 지시 국방신 제29호로 군종목사 제도가 한국군 안에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군종요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종군목사 및 신부들을 모집했다. 제1차로 1951년 2월 28일 32명의 목사와 신부가 무보수 촉탁으로 일하게 됐다. 3월 12일에 8명이 추가 모집됐다. 교파별로 보면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천주교가 모집됐다.

목사안수를 받은 군목은 정식 군목이라 하여 모자에 백색 십자가를, 신학교만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군목은 보조 군목이라 하여 모자에 청색 십자가를 붙이게 했다.
03
한국전쟁과
교회 지형의 변화

1) 북한 교인들의 월남, 남한에서 북한 교회 재건

한국전쟁 기간에, 특히 ‘1·4 후퇴’ 기간에, 북한의 교인들이 대거 남한으로 왔다. 월남 피난민들이 사방에서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피난민들은 한 교회에 대략 50~60명씩 다세대(多世帶)로 들어가 군거(群居)했다. 계속 부산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새로운 피난 도시를 물색했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본국(미국) 해군과 교섭해서 교역자 가족부터 제주도와 거제도, 가덕도 등으로 분산 수용했다.

1951년 6월 10일 평양에서 피난 온 교역자(김윤찬, 김세진, 임종호)와 교인들이 부산 보수동에 ‘평양교회’를 창립했다. 1952년에 부산에는 월남 피난민 교회가 여기저기에서 설립되었다.

이북신도대표회가 1951년 9월 부산 영락교회에서 임시총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의 교회재흥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의되었다. 피난민 교인들이 남한 전 지역에 흩어져 있었기에 이들을 찾아 방문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신앙을 굳게 하는 것이었다. 위로방문단 일행은 11월 9일 부산을 떠나 제주도, 대구, 서울 영등포, 인천, 수원, 천안, 온양, 조치원, 청주, 대전, 이리, 군산, 광주, 순천, 여수, 부산으로 돌아오는 45일의 일정(12월 15일까지)을 밟았다.

 

2) 교회의 사회봉사

1946년 12월에 개최된 제48회 경남노회 정기노회가 ‘신사참배는 강제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것이기에’ 참여자들에게 더 이상 죄와 잘못을 묻지 않을 것과 고려신학교 승인취소를 결의했다. 이 결의에 반발한 한상동이 노회를 탈퇴했고 지역의 많은 교회들도 노회의 결의에 항의하는 소동이 잇달았다. 1948년의 총회(제34회)가 처음으로 고려신학교의 문제를 다루며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식 천명하자 경남노회는 이 결의를 근거로 두 번째 고려신학교 승인 취소를 결의했다. 이 결의로 말미암아 경남노회는 첫째는 교회 재건을 위해 신앙쇄신을 주장하는 ‘고려신학교파’(경남법통노회), 둘째는 고려신학교 승인을 반대하고 신사참배 전력이 있는 ‘교권파’, 셋째는 ‘중도파’의 3개 분파로 나눠졌다. 그러나 교권파의 중심역할을 하던 김길창은 별도의 새로운 경남노회를 조직했고 총회는 이들을 합법적인 노회로 인정했다.

1947년 봄, 총회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 이념에 반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재학생 51명이 조선신학교의 “근대주의 신학사상 소개와 성경의 고등비평을 배척한다.”는 요지로 6쪽 분량의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했는데 주로 교수 김재준을 겨냥하고 있었다. 총회가 이 진정서를 받아들여서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심사위원회는 학교 이사진과 교수진의 퇴진을 총회에 건의하고, 이 안이 부결되면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결의했다. 한 달 뒤에 열린 제34회 총회(1948.4. 20.)에서 이 안이 부결되고 새로운 신학교가 ‘장로회 정통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서울 남산(南山)에서 시작됐고 고려신학교의 승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10월 14일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박형룡은 총회의 승인이 이뤄지지 않자 4월 말에 교장직을 사퇴하고 새로운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50여 명의 학생들이 그를 따라 서울로 왔다. 제35회 총회(1949)는 신설된 장로회신학교(교장 박형룡)의 총회 직영 결의와 함께 조선신학교와 합동안을 통과시켰다.

 

3) 강원도와 이북 지역 장로교회 변화

1946년 6월에 열린 제32회 총회(소위 ‘남부총회’)는 강원도 지역의 선교와 교회설립을 시작했다. 총회는 1936년부터 ‘총회의 전도 구역이었던 강원도’의 교회들을 ‘경기노회로 편입케 하기로’ 한다고 결의해서 경기노회 강원시찰로 편입됐다. 그런데 태백산맥 동쪽에 있는 영동지방(양양, 강릉, 삼척 등)의 교회들이 대체로 경기노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5년 8·15 해방 이후 태백산맥을 기점으로 영동 지역은 경안노회 강원시찰로, 영서 지역은 경기노회 강원시찰로 조직됐다. 해방 직후 월남한 장로교 교인들 가운데 일부가 강원도에 정착했고 처음에는 감리교회에 다니다가 피난민 교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장로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1946년 3월에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많은 북한지역 교인들이 월남하기 시작해서 9월까지 월남인이 482,000명에 이르렀다. 월남 인구는 1947년 말까지 꾸준히 늘어났다.

1946년 4월에 월남 교인들이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회장 한경직 목사)를 조직했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이북 전(全) 지역에서 내려오는 월남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나날이 크게 늘어나자, 1948년 4월 정기총회 때 이들(이북 교역자 전부와 이북 각도 대표 장로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목적으로 회칙을 개정하면서 연합회의 명칭을 ‘이북기독교신도대표회’로 개칭했다. 이후 관북 출신월남 교인이 늘어나자 ‘관북교우회’를 조직하고 분리해 나왔다.

이북신도대표회는 북한(특히 평양)에서 교회가 경영하던 학교를 남한에서 재건하는 교육사업을 벌였다. 월남피난민들이 남한(서울)에 정착하자 곧바로 그동안 학업을 중단한 자녀의 학교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월남한 교인들은 자기네들만이 모이는 예배당을 간절히 바랐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1947년 가을 서울을 방문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총무(스미스)에게 예배당건축비 10만 불(달러) 보조를 요청했고 5년 기한으로 5만 불(달러)을 빌려 기존 건물을 매입하고 30여개 교회를 신축했다. 이와 함께 피난민 교회들이 활발히 전도운동을 벌렸고 이러한 교회에서 월남 교역자들이 새로운 교역의 기회를 가지게 됐다.
제 109회기 총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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