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 교인들의 월남, 남한에서 북한 교회 재건
한국전쟁 기간에, 특히 ‘1·4 후퇴’ 기간에, 북한의 교인들이 대거 남한으로 왔다. 월남 피난민들이 사방에서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피난민들은 한 교회에 대략 50~60명씩 다세대(多世帶)로 들어가 군거(群居)했다. 계속 부산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새로운 피난 도시를 물색했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본국(미국) 해군과 교섭해서 교역자 가족부터 제주도와 거제도, 가덕도 등으로 분산 수용했다.
1951년 6월 10일 평양에서 피난 온 교역자(김윤찬, 김세진, 임종호)와 교인들이 부산 보수동에 ‘평양교회’를 창립했다. 1952년에 부산에는 월남 피난민 교회가 여기저기에서 설립되었다.
이북신도대표회가 1951년 9월 부산 영락교회에서 임시총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의 교회재흥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의되었다. 피난민 교인들이 남한 전 지역에 흩어져 있었기에 이들을 찾아 방문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신앙을 굳게 하는 것이었다. 위로방문단 일행은 11월 9일 부산을 떠나 제주도, 대구, 서울 영등포, 인천, 수원, 천안, 온양, 조치원, 청주, 대전, 이리, 군산, 광주, 순천, 여수, 부산으로 돌아오는 45일의 일정(12월 15일까지)을 밟았다.
2) 교회의 사회봉사
1946년 12월에 개최된 제48회 경남노회 정기노회가 ‘신사참배는 강제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것이기에’ 참여자들에게 더 이상 죄와 잘못을 묻지 않을 것과 고려신학교 승인취소를 결의했다. 이 결의에 반발한 한상동이 노회를 탈퇴했고 지역의 많은 교회들도 노회의 결의에 항의하는 소동이 잇달았다. 1948년의 총회(제34회)가 처음으로 고려신학교의 문제를 다루며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식 천명하자 경남노회는 이 결의를 근거로 두 번째 고려신학교 승인 취소를 결의했다. 이 결의로 말미암아 경남노회는 첫째는 교회 재건을 위해 신앙쇄신을 주장하는 ‘고려신학교파’(경남법통노회), 둘째는 고려신학교 승인을 반대하고 신사참배 전력이 있는 ‘교권파’, 셋째는 ‘중도파’의 3개 분파로 나눠졌다. 그러나 교권파의 중심역할을 하던 김길창은 별도의 새로운 경남노회를 조직했고 총회는 이들을 합법적인 노회로 인정했다.
1947년 봄, 총회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 이념에 반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재학생 51명이 조선신학교의 “근대주의 신학사상 소개와 성경의 고등비평을 배척한다.”는 요지로 6쪽 분량의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했는데 주로 교수 김재준을 겨냥하고 있었다. 총회가 이 진정서를 받아들여서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심사위원회는 학교 이사진과 교수진의 퇴진을 총회에 건의하고, 이 안이 부결되면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결의했다. 한 달 뒤에 열린 제34회 총회(1948.4. 20.)에서 이 안이 부결되고 새로운 신학교가 ‘장로회 정통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서울 남산(南山)에서 시작됐고 고려신학교의 승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10월 14일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박형룡은 총회의 승인이 이뤄지지 않자 4월 말에 교장직을 사퇴하고 새로운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50여 명의 학생들이 그를 따라 서울로 왔다. 제35회 총회(1949)는 신설된 장로회신학교(교장 박형룡)의 총회 직영 결의와 함께 조선신학교와 합동안을 통과시켰다.
3) 강원도와 이북 지역 장로교회 변화
1946년 6월에 열린 제32회 총회(소위 ‘남부총회’)는 강원도 지역의 선교와 교회설립을 시작했다. 총회는 1936년부터 ‘총회의 전도 구역이었던 강원도’의 교회들을 ‘경기노회로 편입케 하기로’ 한다고 결의해서 경기노회 강원시찰로 편입됐다. 그런데 태백산맥 동쪽에 있는 영동지방(양양, 강릉, 삼척 등)의 교회들이 대체로 경기노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5년 8·15 해방 이후 태백산맥을 기점으로 영동 지역은 경안노회 강원시찰로, 영서 지역은 경기노회 강원시찰로 조직됐다.
해방 직후 월남한 장로교 교인들 가운데 일부가 강원도에 정착했고 처음에는 감리교회에 다니다가 피난민 교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장로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1946년 3월에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많은 북한지역 교인들이 월남하기 시작해서 9월까지 월남인이 482,000명에 이르렀다. 월남 인구는 1947년 말까지 꾸준히 늘어났다.
1946년 4월에 월남 교인들이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회장 한경직 목사)를 조직했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이북 전(全) 지역에서 내려오는 월남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나날이 크게 늘어나자, 1948년 4월 정기총회 때 이들(이북 교역자 전부와 이북 각도 대표 장로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목적으로 회칙을 개정하면서 연합회의 명칭을 ‘이북기독교신도대표회’로 개칭했다. 이후 관북 출신월남 교인이 늘어나자 ‘관북교우회’를 조직하고 분리해 나왔다.
이북신도대표회는 북한(특히 평양)에서 교회가 경영하던 학교를 남한에서 재건하는 교육사업을 벌였다. 월남피난민들이 남한(서울)에 정착하자 곧바로 그동안 학업을 중단한 자녀의 학교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월남한 교인들은 자기네들만이 모이는 예배당을 간절히 바랐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1947년 가을 서울을 방문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총무(스미스)에게 예배당건축비 10만 불(달러) 보조를 요청했고 5년 기한으로 5만 불(달러)을 빌려 기존 건물을 매입하고 30여개 교회를 신축했다. 이와 함께 피난민 교회들이 활발히 전도운동을 벌렸고 이러한 교회에서 월남 교역자들이 새로운 교역의 기회를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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