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신교단(1952)과 기장교단(1953)의 분립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장로교회 총회(제37회)에 총대를 파송하여 총회와 관계복원을 시도했다. 그러나 총회는 “고려신학교 및 그 관련 단체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재(再)천명했다. 1952년 9월 11일 경남법통노회(제57회)는 총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목사 50명, 장로 37명의 총대가 참석한 거운데서 ‘총노회’(總老會)를 조직한 것이 ‘고신교단’(高神敎團)이 됐다.
장로교 제37회 총회(1952)는 김재준이 ‘성경 유오설’을 주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목사직을 박탈하고 그의 소속노회인 경기노회에 제명을 지시했다. 이듬해 장로교 총회(제38회, 1953) 석상에서 경기노회가 김재준의 면직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총회는 기존의 결의를 다시 확인하고 공포했다. 이미 총회는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 졸업생에게 교역자의 자격을 주지 않기로 결의했다. 조선신학교 측의 별도 총회가 6월 10일에 서울 성남교회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새 총회의 창단이념과 강령을 선포하는 법통 제38회 총회가 열렸다. 한국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로 말미암아 ‘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이 생성됐다.
2) “신사참배 취소성명”(1954)
장로교의 교단 분열이 계속해서 노회 분규와 개교회 분쟁으로 확산됐다. 1954년에는 장로교회가 현재 고려신학교파, 재건파, 복구파, 자유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총회는 이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신실한 목회자로 교계의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던 출옥성도였고, 최근에 ‘경남노회육성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고려신학교 측이 총회로 복귀하도록 노력했던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를 제39회 총회(1954) 총회장으로 추대했고 총회의 총대 대다수는 장로교의 교단 분열이 신사참배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죄를 깊이 뉘우쳐야 한다고 보았다. 총회는 1938년(제27회)에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기 위하여 위원회(이원영, 명신홍,권연호)를 선정하고, 위원회는 5가지 절차를 보고했고 1)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문서로 작성해서 전국 교회에 공포하고, 2) 총회 기간에 (총대 전원<全員>이) 통회자복하며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위해 기도하고, 3) 위원 5인을 선택해 신사참배 주동자들을 심사한 후 해당노회에 통지해 처벌하도록 할 것, 4) 신사참배로 순교한 성도의 유가족을 위해 총회기간 중에 한 차례 연보하고 6월 첫 주일에 전국 각 교회가 연보해 유족에게 위문금을 드릴 것, 5) 6월 첫 주일을 통회주일로 정하고 각 노회를 통해 전국교회가 하루 금식통회하며 속죄를 위해 기도할 것 등이었다. 총회는 이 가운데서 4개 항목을 받아들여서 실행하기로 했다.
3) 합동과 통합의 분립
1959년에 장로교회의 교단이 세 번째 분열됐다. 이번의 분열에는 장로회신학교의 교장 박형룡이 학교부지 구입을 위한 학교재정을 사기당한 사건(소위 “삼천만 환 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고, 1959년 전후에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신학적 인식차이로 말미암은 갈등이 부차적으로 작용했다.
제43회 총회(1958)에 “신학교의 3,000만 환 사기사건”이 보고됐다.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총대들은 그 책임소재를 논의한 끝에 박형룡 교장 사임서를 수리했고 교수임용 안건이 부결됐는데 박형룡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정통보수주의 신학자 박형룡 박사를 반대하고, 사표수리한 쪽은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新신학 용공주의자들이다.”라고 비난하며 “우리는 정통적 보수주의 신앙을 사수한다. 진리와 비진리는 하나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는데 이 논박은 그 다음해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제44회 총회에서 교단 분립으로 진화됐다.
(1) 세 번째 교단 분립 과정
[대전총회:3일 동안의 공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1959)의 개최장소가 새문안교회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총회 소집공고는 총회를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회한다고 발표했다. 제44회 총회가 9월 24일 오후 7시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회됐다. 회순일정에 따라 총대 호명시간이 되었는데, 총회의 총대명단을 개회 한 달 전에 모든 총대에게 통지해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비로소 총대 명단이 배부됐다. 게다가 경기노회의 총대란을 비워 둔 채 호명이 진행됐다. 경기노회가 5월 29일 정기노회에서 선출된 명단(전 노회장 이환수 목사명의)과 7월 9일 임시노회에서 선출된 명단(현 노회장 강신명 목사 명의)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총회가 정회되고 9월 28일 오전 9시 총회가 속개됐다. 문제 해결을 위한 연석회의의 제안대로 “총회를 11월 24일 속개하고 경기노회는 그때까지 총대를 개선해 오도록 하자.”는 동의가 성립됐다. 그러나 개의도 성립되었는데, “증경총회장단과 총회 임원회와 각 선교부(미국, 호주 등)대표 1인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위원회로 하여금 타협점을 찾아서 보고하게 하자.”는 안이었다. 그런데, 회장이-회의진행법에 따라-개의를 먼저 묻지 않고 동의를 먼저 물었다. 그리고 “예.” 소리와 함께 가결을 선포하자 안광국 목사가 회의장 앞으로 달려 나가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총회 임원 불신임안을 낭독했다. 총회장 노진현은 회장의 권한으로 총회를 11월 24일까지 정회한다고 선포하고 사회석에서 내려왔고 정회에 항의하는 회원들이 회의진행을 요구하다 총회개최 장소인 중앙교회 담임목사의 강제력 발동으로 회의장 바깥으로 강제 퇴장당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회의장소를 서울의 연동교회로 정했다. 그리고 모든 총대들에게 비상 연락으로 이튿날(9월 29일) 오전 10시에 총회를 계속하기로 했다.
[연동 측 속회]
다음 날, 9월 29일 오전 10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제44회 총회의 계속 회의가 열렸다. 증경총회장 전필순 목사를 임시회장으로 선출하여 회의를 진행했다. 전국 33개 노회 총대 284명 가운데서 154명이 참석했다(목사 70명, 장로 73명, 선교사 11명). 대체로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있는 지역의 노회들은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번 총회에서 결의된 주요한 사안은 다음과 같았다.
① 여러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교계의 혼란은 NAE와 관련된 인사들이 일으킨
파당적 행위에 기인하였다고 보기에, 이에 이제부터 장로교회의 교인은 이단체에서
탈퇴해야 한다.
② 세계교회협의회(WCC)는-저들이 주장하는 대로-“용공, 신(新)신학,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화평과 통일을 위해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표파송을 정지하기로 한다.
③ 계일승 박사를 신학교 교장서리로 승인한다.
[승동 측 총회]
대전총회에서 총회장 노진현이 정회를 발표했던 그대로 총회가 11월 24일에 속개됐다. 그런데 본래 새문안교회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동안 새문안교회가 연동 측 교회가 되었으므로,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개됐다. 이 총회에 내한 선교사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이 총회에서 결의된 주요한 사안은 다음과 같았다.
①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기로 한다.
② NAE에 가입한 목사와 전도사는 여기에서 탈퇴하도록 한다.
③ 종교교육부 총무 안광국 목사를 해임한다. 또 총회신학교 학장 서리 계일승을 비롯하여
김윤국, 박창환 교수를 해임하기로 한다. 신학교 교수로 박형룡, 김치선, 김홍전을
임명한다.
④ 미국 연합장로회 선교부·미국 남장로회 선교부·호주 장로회 선교부에 대하여 경고문을
발표하기로 하되, 연동교회에서 모인 총회를 인정한 점과 신학교 이사장과 학장서리를
인정한 점에 대하여 경고문을 발표한다.
[신학교의 분열]
총회가 둘로 분열되자 신학교도 분열됐다. 당시의 정부는 신학교 자리에다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신학교는 보상금 2,400만 환을 받았고 임시 교사(校舍)로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등학교의 옛 건물로 옮겨 가게 됐다. 연동 측은 태능에 매입해 둔 7만 평 부지에 신학교 신축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부지를 신설되는 서울여자대학에 넘겨주고 새로이 성동구 광장동에 16,946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960년 4월에 본관 720평을 착공하여 12월에 준공하였다. 기숙사는 1960년에 제1차 공사를 하였고 그 다음 해에 제2차 공사를 끝냄으로써 총 510평 신축공사를 끝냈다. 본관의 건축비를 미국 연합장로교가 지원했고 또 기숙사의 건축비를 미국 남장로교가 지원했다. 1960년 2월 2일 정부로부터 장로회신학대학의 인가가 나왔다. 그래서 9월 7일 학교는 신설동 임시교사에서 광장동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승동 측의 제소]
신학교가 분열되자, 승동 측은 신학교의 학장서리 계일승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제소내용은, “연동교회에서 모인 총회는 합법적인 총회가 아니다. 신학교 정관에는 교장(학장)이 이사회의 선정으로 총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계일승 교장서리는 연동측의 승인을 받은 것이므로 무효다. 또한 연동 측 총회에서 승인된 이사들도 무효이다.” 승동 측의 이러한 제소에 대하여 서울지방법원이 1960년 7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 결의 유무효 확인의 점은, 이를 각하하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기로” 판결했다.
(2) 재결합을 위한 활동
총회가 분열되는 가운데서 중립을 주장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과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이 분열된 양측의 화합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였다. 화합을 위한 활동에 대하여 승동 측이 아주 냉담하게 반응했다. 만일 연동 측도 승동 측처럼 냉담하게 반응한다면 양측의 화합은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될 것이고 또한 둘로 쪼개진 총회가 셋으로 분열될 것인데, 승동 측, 연동 측, 중립측으로 쪼개어질 것이다.
[화합을 위한 회담]
이런 상황에서 1960년 1월 1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기독교서회 회의실에서 남장로교 선교부의 주선으로 양측의 회담이 열렸다. 연동 측은 분열된 총회의 화합을 위하여-남장로교 선교부의 제안을 받아들여-세계교회협의회에서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승동 측의 요구대로 에큐메니칼운동을 전폐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만일 에큐메니칼운동을 전폐하게 되면 국내에서 진행되는 모든 연합사업도 중단해야 하고 심지어는 내한 장로교 선교부들 조차 거부해야 하므로 이것을 수락할 수 없다고 밝혔다. 화합을 위한 회담이 정회됐다. 다음날인 1월 15일 오전 10시에 회의를 계속하기로 했으나 대신 승동 측 수습위원장 이대영의 서신이 도착했다. “우리 (승동 측) 임원들은 신중히 검토한 결과 지난 14일에 제출한 그 최종안과 변함이 없음을 통지한다.”는 것이었다.
(3) “통합”총회의 성립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와 중립 측이 앞장서고 연동 측이 뒤에서 밀며 추진한 통합노력이 이루어져서 1960년 2월 17일에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통합”총회가 개회됐다. 증경총회장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통합총회가 열렸는데 총대는 245명(목사 106명, 장로 118명, 선교사 21명)이었다. 충남노회와 황남노회는 불참했고 함북노회와 목포노회가 참관인으로 참석했다. 통합총회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하여 대전 중앙교회와 서울 연동교회에서 모인 제44회 총회를 확인하였고, 그 모든 결의를 인수한다고 했다. 총회에서 결의한 중요한 사안은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용공도 아니고, 신신학도 아니며, 더욱이 단일 교회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니지만 분열된 장로교회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 이 단체에서 탈퇴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통합총회가 개회되기 며칠 전인 2월 13일 승동 측은 고신교단과 합하여 “합동 측”이란 별칭을 가졌고, 그러다가 1962년 11월 19일 양자가 또 다시 분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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