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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들이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은 조금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온 것이다(요 15:4­6, 겔 36:26­27). 또한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이미 받은 은혜 이외에 동일한 성령의 실제적 영향이 필요하다. 이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고 행하게 된다(빌 2:13, 4:13, 고후 3:5).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이는 아무 의무를 실천할 필요가 없는 것같이 생각해서 태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분기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빌 2:12, 히 6:11­12, 벧후 1:3, 5, 10­11, 사 64:7, 딤후 1:6, 행 26:6­7, 유 1:20­21).
4. 복종을 통해서 이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도의 선행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잉여분의 공덕을 세운다든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기에 훨씬 못 미친다(눅 17:10, 느 13:22, 욥 9:2­3, 갈 5:17).
5.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행동들을 통해서도 죄의 용서나 하나님의 손에 있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그것들과 장차 받을 영광 사이에 큰 불균형이 있고, 또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써 우리가 도움을 얻는다든가 전에 범한 죄의 빚을 탕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롬 3:20, 4:2, 4, 6, 엡 2:8­9, 딛 3:5­7, 롬 8:18, 시 16:2, 욥 22:2­3, 35:7­8).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뿐이요, 우리는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눅 17:10). 그것이 선한 행동이라면 그것이 성령에서 나왔기 때문이다(갈 5:22­23). 그런데 그러한 행동이 우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 가지 약점과 불완전성으로 심히 더럽게 되었고 또한 그런 것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도저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견딜 수 없다(사 64:6, 갈 5:17, 롬 7:15, 18, 시 143:2, 130:3).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납되었으므로 그들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되었다(엡 1:6, 벧전 2:5, 출 28:38, 창 4:4, 히 11:4).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흠이 없거나 비난받을 것이 없다는 뜻에서가 아니라(욥 9:20, 시 143:2),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그것들을 보시면서 그들의 행동에 여러 가지 약점과 불완전성이 있기는 하나 그것을 순전한 것으로 용납하고 상주기를 기뻐하셨다(히 13:20­21, 고후 8:12, 히 6:10, 마 25:21, 23).
7.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한 일은 가령 그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이며 그 자체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가치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죄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왕하 10:30-31, 왕상 21:27, 29, 빌 1:15-16, 18). 그것은 믿음으로써 청결케 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창 4:3-5, 히 11:4, 6), 그의 말씀에 따라서 정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고전 13:3, 사 1:1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옳은 목적에 따라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6:2, 5, 16). 그러나 그들이 그것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더 죄가 되며 하나님께 더 불쾌한 일이 된다(시 14:4, 36:3, 욥 21:!4-15, 마 25:41-45, 23:23).
제17장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에 관하여]
1.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빌 1:6, 벧후 1:10, 요 10:28­29, 요일 3:9, 벧전 1:5, 9, 요 17:9).
2.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택의 불변한 결정에 의한 것이다(딤후 2:18­19, 렘 31:3).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에 있는 것이다(히 10:10, 14, 13:20­21, 9:12­15, 롬 8:33­39, 요 17:11, 24, 눅 22:32, 히 7:25). 성령의 내재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은 것이요(요 14:16­17, 요일 2:27, 3:9), 은혜의 언약의 본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렘 32:40, 히8:10-12). 이와 같은 모든 것에서 또한 구원의 확실성과 무오성이 나타난다(요 10:28, 살후 3:3, 요일 2:19, 살전 5:23­24).
3. 그러나 그들은 사단과 이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이 강해짐과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무시하므로 무서운 죄에 빠지기도 한다(마 26:70, 72, 74). 또 얼마 동안은 그 안에 있기도 한다(시 51: 표제 및 14, 삼하 12:9, 13).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고(사 64:5, 7, 9, 삼하 11:27), 성령으로 하여금 탄식케 한다(엡 4:30). 그들이 받은 은혜와 위로 중의 어느 부분은 빼앗기게 되며(시 51:8, 10, 12, 계 2:4, 아 5:2­4, 6),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지고(사 63:17, 막 6:52, 16:14, 시 95:8), 양심은 상처를 입고(시 32:3­4, 51:8), 남을 해치고 걸려 넘어지게 하며(삼하 12:14) 그들 자신에게 일시적 심판을 가져오게 한다(시 89:31­32, 고전 11:32).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하여]
1. 위선자나 그밖에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호의와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욥 8:13­14, 미 3:11, 신 29:9, 요 8:41) 거짓 소망과 육적 오만에 빠져서 허망하게도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들이 가지는 이 소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마 7:22­23, 욥 8:13). 그러나 주 예수를 참으로 믿고 성실하게 그를 사랑하고 그의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그들이 은혜의 자리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요일 2:3, 3:14, 18­19, 21, 24, 5:13)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중에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망은 그들을 절대로 부끄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롬 5:2, 5).
2. 이 확실성은 허망한 소망에 근거한 단순한 억측이거나 그럴듯한 신념이 아니다(히 6:11, 19). 그것은 구원을 약속한(히 6:17­18) 신적 진리에 근거한 믿음의 틀림없는 확신이다. 그것은 약속된 은혜의 내적 증거요(벧후 1:4­5, 10­11, 요일 2:3, 3:14, 고후 1:1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해 주는 양자의 영의 증거이다(롬 8:15­16). 이 영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증거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다(엡 1:13­14, 4:30, 고후 1:21­22).
3. 이 틀림없는 확신은 참 신자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많은 고난을 당한 후에야 참여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일 5:13, 사 50:10, 막 9:24, 시 77:1­12, 88장), 하나님께서 그저 주신 것들을 성령에 의하여 알게 되어 별도의 계시 없이도 일상적인 수단들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고전 2:12, 요일 4:13, 히 6:11­12, 엡 3:17-19).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자기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할 것이 각자에게 부여된 의무이다(벧후 1:10).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 평화에 넘치며, 기쁨을 맛보고,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리고, 또한 복종하는 일에 있어서는 힘 있고 유쾌하게 된다. 이것이 이 확신이 주는 정당한 결과이다(롬 5:1­2, 5, 14:17, 15:13, 엡 1:3­4, 시 4:6­7, 시 119:32). 그래서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방탕한 생활에서 멀리 떠나게 한다(요일 2:1­2, 롬 6:1­2, 딛 2:11­12, 14, 고후 7:1, 롬 8:1, 12, 요 3:2­3, 시 130:4, 요일 1:6­7).
4. 참 신자는 자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들이 그 확신을 보존하기를 게을리 한다. 양심을 아프게 하고 성령을 탄식케 하는 특별한 죄를 범하기도 한다. 갑작스럽고 강렬한 시험에 빠지기도 한다. 때로는 하나님이 자기의 얼굴빛을 돌이키심으로 그들이 어두움에 다니게 되어 전혀 빛을 가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므로 그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동요되고 약해지고 중단되기도 한다(아 5:2­3, 6, 시 51:8, 12, 14, 엡 4:30­31, 시 77:1­10, 마 26:69­72, 시 31:22, 88:1­18, 사 50:10).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씨를 소유하지 않을 때는 절대로 없다. 믿음의 생활이나, 그리스도와 형제에 대한 그 사랑, 마음의 진실성, 의무에 대한 양심, 이와 같은 것이 완전히 결핍한 때는 없다. 이와 같은 것에서 이 확신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때에 따라 소생한다(요일 3:9, 눅 22:32, 욥 13:15, 시 73:15, 51:8, 12, 사 50:10). 또한 그들은 심한 실망 속에서도 그 보증의 도움을 받는다(미 7:7­9, 렘 32:40, 사 54:7­10, 시 22:1, 88:1­18).
제19장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1. 하나님은 한 율법을 행위에 대한 약속으로서 아담에게 주셨다. 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후손을 개인적이고, 온전하고, 거부할 수도 없고, 항구적인 복종에 매이게 하셨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이 율법을 완성할 때에는 생명을 주고 범할 때에는 죽음을 준다고 경고하셨다. 또한 아담에게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창 1:26­27, 2:17, 롬 2:14­15, 10:5, 5:12, 19, 갈 3:10, 12, 전 7:29, 욥 28:28).
2.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이 율법은 의에 관한 완전한 규칙으로서 존속하게 되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의 형식으로 전하여 주셔서 두 돌비에 새겨졌다(약 1:25, 2:8, 10-12, 롬 13:8­9, 신 5:32, 10:4, 출 34:1, 롬 3:19).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기록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타인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를 기록해 두었다(마 22:37­40, 출 20:3­18).
3. 보통 도덕적 율법이라고 부르는 이 율법 외에도, 하나님은 그 시대의 교회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의식에 관한 법들을 주기를 기뻐하셨다. 여기에는 몇 가지 독특한 의식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예배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 행동, 고난, 그리고 공로를 예표로 해서 보여 준다(히 9장, 10:1, 갈 4:1­3, 골 2:17).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의무에 관한 여러 가지 교훈이 있다(고전 5:7, 고후 6:17, 유 1:23). 모든 의식에 관한 율법은 신약성경시대에서는 폐기되었다(골 2:14, 16­17, 단 9:27, 엡 2:15­16).
4. 하나님은 한 국가를 이룬 그들에게 또한 여러 가지 법률을 정해 주셨다. 그것은 그 민족과 더불어 없어졌으며 현재는 그 법률에 있는 일반적인 정당성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다른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출 21장, 22:1-19, 창 49:10, 벧전 2:13­14, 마 5:17, 38­39, 고전 9:8­l0).
5. 도덕법은 의롭게 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도 그것에 영원토록 복종케 한다(롬 13:8­10, 엡 6:2, 요일 2:3­4, 7­8, 롬 3:31, 6:15). 또한 단지 그 안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서도 복종케 한다(약 2:10­11). 그리스도는 이 의무를 복음서 안에서도 제외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하셨다(마 5:17­19, 약 2:8, 롬 3:31).
6. 참 신자는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 아래에 있어서 그것으로써 의롭게 되거나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니나(롬 6:14, 갈 2:16, 3:13, 4:4­5, 행 13:39, 롬 8:1), 율법은 그들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그것은 생활의 표준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또한 그들이 해야 할 의무를 그들에게 알게 해준다. 또는 그들을 지도하고 그것에 따라 걷도록 한다(롬 7:12, 22, 25, 시 119:4­6, 고전 7:19, 갈 5:14, 16, 18­23). 그들의 본질과 마음과 생활에 있는 사악한 타락성을 발견케 한다(롬 7:7, 3:20).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따라 자신을 반성해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죄 앞에서 겸손하게 되고, 또한 죄에 대한 증오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약 1:23­25, 롬 7:9, 14, 24).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아는 동시에, 그의 완전한 복종에 관하여도 더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갈 3:24, 롬 7:21, 25, 8:3­4). 그것은 또한 중생한 자들이 율법이 죄를 금하고 있는데 따라서 그들의 부패성을 막는 데 사용된다(약 2:11, 시 119:101, 104, 128). 그리고 율법의 경고는 가령 그들이 율법에서 경고된 저주에서는 해방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죄가 무엇에 해당하며 이생에서 그것에 대한 대가로서 어떠한 고난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스 9:13­14, 시 89:30­34).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약속은 그들에게 복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또한 그것을 완수한 데 대하여 그들이 무슨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레 26:1, 10, 14, 고후 6:16, 엡 6:2­3, 시 37:11, 마 5:5, 시 19:11).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행위에 대한 약속으로 그들이 지켰다고 해서 그들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다(갈 2:16, 눅 17:10). 마찬가지로 율법이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은총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롬 6:12, 14, 벧전 3:8­12, 시 34:12­16, 히 12:28­29).
7. 상기한 바와 같은 율법의 사용법은 복음의 은총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잘 따르는 것이다(갈 3:21, 딛 2:11­14). 그리스도의 영은 율법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를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행하도록 인간의 의지를 억제하기도 하고 능력 있게 하기도 하신다(겔 36:27, 히 8:10, 렘 31:33).
제20장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1. 그리스도가 복음시대에 있는 신자들을 위하여 값 주고 사신 자유는 그들이 죄와 하나님의 정죄와 도덕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있다(딛 2:14, 살전 1:10, 갈 3:13). 또한 그 자유는 현재 이 악한 세상과 사단의 멍에와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과(갈 1:4, 골 1:13, 행 26:18, 롬 6:14), 그리고 악한 고뇌와 죽음의 고통과 무덤에서의 승리와 영원한 파멸에서의 해방에 있다(롬 8:28, 시 119:71, 고전 15:54­57, 롬 8:1). 또한 이 자유는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고(롬 5:1­2) 노예적인 공포에서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사랑과 자발적인 마음으로(롬 8:14­15, 요일 4:18)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던 모든 신자에게도 있었던 일이다(갈 3:9, 14). 그러나 신약에서는 유대교회가 복종했던(갈 4:1­3, 6­7, 5:1, 행 15:10­11)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에서 자유함을 얻으므로 신자의 자유가 더욱 확대되었으며(히 4:14, 16, 10:19­22), 율법 아래서 믿던 이들보다 더 큰 담력을 가지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접근하며(요 7:38­39, 고후 3:13, 17­18), 그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과의 더 충만한 교통을 가지게 되었다.
2.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가 되신다(약 4:12, 롬 14:4). 이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에 배치되는 어떤 것에서나 혹은 믿음과 예배에 관한 인간적인 교리와 계명에서 벗어날 자유를 양심에 주셨다(행 4:19, 5:29, 고전 7:23, 마 23:8­10, 고후 1:24, 마 15:9). 따라서 그와 같은 교리를 믿거나 그와 같은 명령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위반하는 것이다(골 2:20­23, 갈 1:10, 5:1, 2:4­5, 시 5:1). 그리고 맹신을 강요하거나 절대적이고 맹목적 복종은 양심과 이성을 파멸시키는 것이다(롬 10:17, 14:23, 사 8:20, 행 17:11, 요 4:22, 호 5:11, 계 13:12, 16­17, 렘 8:9).
3. 신자의 자유를 구실삼아 죄를 범하거나 욕심을 품거나 하는 사람은 신자의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다. 신자의 자유의 목적은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구원을 얻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갈 5:13, 벧전 2:16, 벧후 2:19, 요 8:34, 눅 1:74­75).
4. 그리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력과 그리스도가 값 주고 사신 자유는 서로를 파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도와서 보존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자유를 구실 삼는 어떤 사람들이 정당한 권력에 반대하든지 혹은 세속적이든 교회적이든 간에 그것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마 12:25, 벧전 2:13­14, 16, 롬 13:1­8, 히 13:17). 그들이 그와 같은 의견을 발표하거나 계속적으로 그와 같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자연의 도리에 반대되고, 또는 믿음이나 예배나 대화에 관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교 원리에 반대되며, 신령한 힘과도 반대되는 것이다. 또는 그들 자신의 본성에서든지 혹은 그것을 발표하고 지속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와 같은 그릇된 의견과 행동은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확립한 영원한 평화와 질서에 대해서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문책을 받을 것이요, 교회의 책망과(롬 1:32, 고전 5:1, 5, 11, 13, 요이 1:10­11, 살후 3:6, 14, 딤전 6:3­5, 딛 1:10, 11, 13, 3:10, 마 18:15­17, 딤전 1:19­20, 계 2:2, 14:15, 20, 3:9) 일반 관리의 권한에 의해서 처분될 것이다(신 13:6­12, 롬 13:3­4, 요 5:10­11, 스 7:23­28, 계 17:12, 16­17, 느 13:15, 17, 21­22, 25, 30, 왕하 23:5­6, 9, 20­21, 대하 34:33, 15:12­13, 16, 단 3:29, 딤전 2:2, 사 49:23, 슥 13:2­3).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1. 자연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하나님은 만물의 주가 되시고 통치권을 가지신다. 그는 선하시고 만물에 대하여 선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고 찬양하고 부르고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롬 1:20, 행 17:24, 시 119:68, 렘 10:7, 시 31:23, 18:3, 롬 10:12, 시 62:8, 수 24:14, 막 12:33). 그러나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정해 주셨다. 하나님을 인간의 어떤 망상이나 의향에 따라서 예배하거나, 또는 어떤 가시적인 물질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신 12:32, 마 15:9, 행 17:25, 마 4:9­10, 신 4:15­20, 출 20:4­6, 골 2:23) 어떤 방법을 통하여 사탄의 지시에 따라 예배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계시된 자신의 뜻만을 따라서 예배하도록 정하셨다.
2.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마 4:10, 요 5:23, 고후 13:13, 계 5:11­13). 천사에게나 성인에게나 그밖에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골 2:18, 계 19:10, 롬 1:25). 인간의 타락 이후에는 중보자 없이 또는 무슨 다른 중보자를 통해서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려야 한다(요 14:6, 딤전 2:5, 엡 2:18, 골 3:17).
3.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예배의 특별한 한 부분이다(빌 4:6).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시 65:2). 이 기도가 용납되려면, 각자가 이해력과 존경과 겸손과 열성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심을 가지고(시 47:7, 전 5:1­2, 히 12:28, 창 18:27, 약 5:16, 1:6­7, 막 11:24, 마 6:12, 14­15, 골 4:2, 엡 6:18) 하나님의 뜻에 따라(요일 5:14) 성령의 도움을 얻어 성자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요 14:13­14, 벧전 2:5). 만약 음성을 내어서 기도할 때는 알 수 있는 말로 해야 한다(고전 14:14).
4. 기도는 모든 합당한 것을 들어 주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요일 5:14). 그리고 현재 살아 있거나 장차 출생할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할 것이로되(딤전 2:1-2, 요 17:20, 삼하 7:29, 룻 4:12)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할 것은 아니다(삼하 12:21­23, 눅 16:25­26, 계 14:13).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을 위해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요일 5:16).
5. 성경을 읽을 때는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행 15:21, 계 1:3). 설교는 흠이 없게 하고(딤후 4:2) 신자는 그 말씀을 정성껏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해력과 믿음과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약 1:22, 행 10:33, 마 13:19, 히 4:2, 사 66:2). 마음에 감사를 품고 시를 부르며(골 3:16, 엡 5:19, 약 5:13)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성례전을 합당하게 실시하고 또한 값있게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반적 예배의 모든 부분이다(마 28:19, 고전 11:23­29, 행 2:42). 이 외에 종교적 맹세와(신 6:13, 느 10:29) (그리고) 서원과(사 19:21, 전 5:4­5, 행 18:18) 엄숙한 금식과(욜 2:12, 에 4:16, 마 9:15, 고전 7:5) 특별한 절기에 따라(시 107:1­43, 에 9:22) 드리는 감사예배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여러 절기에 따라 거룩하고 신앙적인 방법으로 할 것이다(히 12:28).
6. 기도나 그밖에 예배의 무슨 부분이 복음의 시대에 있는 현재 예배드리는 그 장소가 고정되어 있거나, 또는 장소나 대상에 따라서 그 예배가 더 훌륭한 것은 아니다(요 4:21). 하나님은 어디서든지(말 1:11, 딤전 2:8) 영과 진리〔안에서〕(요 4:23­24) 예배를 드려야 한다. 각 가정에서(렘 10:25, 신 6:6­7, 욥 1:5, 삼하 6:18, 20, 벧전 3:7, 행 10:2) 매일(마 6:11, 수 24:15) 드리든지, 혼자서(마 6:6, 엡 6:18) 은밀한 곳에서 드리든지, 또는 공동적으로는 더 엄숙하게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이나 섭리에 따라서 부르실 때에는(사 56:7, 히 10:25, 잠 1:20­21, 24, 8:34, 행 13:42, 눅 4:16, 행 2:42) 공적인 모임을 경솔하게 혹은 의식적으로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7. 보통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도덕적이고 적극적이고 영원한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명령을 주셨는데, 특히 칠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지정하셔서 하나님께 거룩한 날로 지키게 하셨다(출 20:8, 10, 11, 사 56:2, 4, 6­7, 사 56:6). 이 날은 창세 때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일주간의 첫 날로(창 2:2­3, 고전 16:1­2, 행 20:7) 변경되었다. 성경에서는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부른다(계 1:10). 이 날은 세상 끝 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다(출 20:8, 10, 마 5:17­18).
8. 이 날을 신자는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떠나서 거룩하게 쉬며, 세상적인 일이나 오락에서도 떠나 쉬어야 할 뿐만 아니라(출 20:8, 16:23, 25­26, 29­30, 31:15­17, 사 58:13, 느 13:15­22)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칠 것이다(사 58:13, 마 12:1­13).
제22장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관하여]
1. 합당한 맹세를 하는 것은 경건한 예배의 한 부분이다(신 10:20). 예배에서 예배드리는 자는 때를 따라 엄숙히 선서하면서 그가 주장하고 약속한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또 그가 서원한 것에 허위가 없는가(출 20:7, 레 19:12, 고후 1:23, 대하 6:22­23) 판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른다.
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만 사람은 서원해야 한다. 그때 그 이름을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한다(신 6:13).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에 대하여 헛되이 또는 경솔하게 서원하거나 또는 다른 무엇으로써 서원한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어서 증오를 받아야 할 것이다(출 20:7, 렘 5:7, 마 5:34, 37, 약 5:12). 맹세는 그 중요성과 시기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보증된 것으로 신구약성경에 다 마찬가지로 허락된 것이다(히 6:16, 고후 1:23, 사 65:16). 따라서 합당한 맹세는 합법적인 권위에 의해 요청될 때에는 이를 행해야 한다(왕상 8:31, 느 13:25, 스 10:5).
3. 누구든지 맹세할 때에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엄숙한 행사라는 점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그때에 자기가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확언해서는 안 된다(출 20:7, 렘 4:2). 누구든지 맹세할 때에는 선하고 옳은 것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맹세하면 안 된다. 그리고 옳다고 믿는 것이나 자기가 실제로 할 수 있고 행하려고 결심한 것 이외의 것에 대해서 맹세하여도 안 된다(창 24:2­3, 5­6, 8­9). 그러나 합법적인 권위로 말미암아 요청되는 때에도 선하고 의로운 것과 관련한 맹세를 거부하는 것은 죄이다(민 5:19, 21, 느 5:12, 출 22:7-11).
4. 맹세를 할 때는 모호한 말이나 애매한 말로 하지 말고 쉽고 평범한 말로 하여야 한다(렘 4:2, 시 24:4). 죄악이 아닌 사실을 맹세했다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지켜져야 한다(삼상 25:22, 32­34, 시 15:4). 또한 신앙의 이해가 다른 기독교인들이나 불신자에게 행한 맹세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겔 17:16, 18­19, 수 9:18­19, 삼하 21:1).
5. 서원도 서약과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을 행할 때도 동일하게 경건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동일한 성실성을 가지고 실행해야 한다(사 19:21, 전 5:4­6, 시 61:8, 66:13­14).
6. 서원은 어떤 피조물에 대해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만 할 것이다(시 76:11, 렘 44:25­26). 그것이 용납되려면 자발적이어야 하며 믿음과 의무감에서 해야 한다. 또한 이미 우리가 받은 은사나 또는 원하는 것이 허락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에서 해야 한다. 이 서원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무와 그 밖의 것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서원의 뜻에 합치되는 한 우리는 그것을 더욱 엄격하게 행해야 한다(신 23:21, 23, 시 50:14, 창 28:20­22, 삼상 1:11, 시 66:13­14, 132:2­5).
7.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것에 대하여 서원해서는 안 된다. 또는 받은 명령을 실천하는 데 방해되거나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나, 그것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약속이나 능력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서원해서는 안 된다(행 23:12, 14, 막 6:26, 민 30:5, 8, 12­13).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교황청의〕 수도원 안에서 일생 동안 독신으로 살겠다고 하는 서원이나 공언한 궁핍생활과 규칙적인 복종을 서원하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고상한 의미에서 너무나 먼 것이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는 도저히 관여할 수 없을 정도로 미신적이고 사악한 함정이다(마 19:11­12, 고전 7:2, 9, 엡 4:28, 벧전 4:2, 고전 7:23).
제23장 [관공직에 관하여]
1. 모든 세계의 최고의 주님이 되시며 왕이 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공동선을 위하여 백성들 위에 공직 제도를 두셔서 자기의 관할 하에 두셨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칼의 힘을 주어 선한 무리를 보호하고 격려하는 반면,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게 하셨다(롬 13:1­4, 벧전 2:13­14).
2. 신자가 이 공직에 임명될 때에 그것을 수락하고 그 일을 집행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잠 8:15­16, 롬 13:1­2, 4). 그들이 이 일에 종사할 때는 특별히 그 나라의 좋은 법에 따라서 경건과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시 2:10­12, 딤전 2:2, 시 82:3­4, 삼하 23:3, 벧전 2:13). 이 목적을 위해서 새로운 언약 아래에서는 정의롭고 꼭 필요한 경우라면 합법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다.(눅 3:14, 롬 13:4, 마 8:9­10, 행 10:1­2, 계 17:14, 16).
3. 공직자는 스스로 설교와 성례를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 나라의 열쇠들을 취급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대하 26:18, 마 16:19, 고전 4:1-2). 하물며 믿음에 관한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요 18:36, 말 2:7, 행 5:29). 그러나 양육하는 아버지와 같이 어떤 한 교파에다 다른 교파보다 우선권을 부여해 주는 일이 없이, 우리의 동일한 주의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공직자의 임무이다. 모든 신자들이 폭력에나 위험에 부딪치지 않고 그들의 성스러운 기능의 모든 부분을 발휘할 수 있는 충분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유를 즐길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사 49:2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 안에서 정규적인 치리회와 훈련책을 정하셨으므로 어떠한 국가의 법이라도 교회의 어떤 교파의 자발적인 회원들이 그들 자신의 고백과 신념에 따라서 행하려는 정당한 신앙생활에 간섭하거나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시 105:5, 행 18:14-16). 공무원의 할 일은 아무도 종교의 구실로나 불신의 이유로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그들의 모든 시민을 실제적으로 보호하고 지켜 주는 동시에 어떠한 다른 사람에게든지 냉대와 폭력이나 악용이나 손상을 주지 않도록 지켜 주며, 모든 종교적, 교회적 모임이 방해나 소란을 받지 않고 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삼하 23:3, 딤전 2:1, 롬 13:4).
4. 모든 공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딤전 2:1­2),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며(벧전 2:17), 세금이나 그 밖의 공납금을 바치고(롬 13:6-7), 양심에 따라 그들의 정당한 명령에 복종하며(롬 13:5, 딛 1:3),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거나 신봉하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공직자가 가지는 옳고 합법적인 권위를 인정치 않거나, 그들에게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복종을 거절할 수는 없다(벧전 2:13­14, 16).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롬 13:1, 왕상 2:35, 행 25:9­11, 벧후 2:1, 10­11, 유 1:8­11). 더욱이 교황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그들에게나 일반 민중에게 대하여 아무런 권력이나 사법권을 가지지 않는다. 가령 그들을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그밖에 어떠한 가식적인 이유를 붙이더라도(살후 2:4, 계 13:15­17) 그들의 주권이나 생명을 빼앗을 권한은 전혀 없다.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1. 기독교의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복을 받은 제도다. 이것은 인류의 행복과 복지를 위하여 제정되었고 성별된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상태에 들어가며 서로의 존경과 사랑을 가슴에 품고 상대방의 부족함과 약함을 참고 견디며, 어려움을 당할 때 서로 위로하고, 그들 자신과 가정을 위하여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준비하며, 서로 위하여 기도하고 삶의 은총의 계승자로서 그들의 수명대로 같이 산다(창 2:24, 마 19:4-6, 창 2:17).
2. 사람의 부패는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이 결합시킨 그들을 부정하게 둘로 쪼개기 쉬우며, 교회는 주 안에서 이루어진 결혼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된 것이라는 점에 관심을 가지며, 파혼이 된 그들이 현재 참회하고 있는 동시에 과거의 결백이나 책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거룩한 관계의 끊어짐은 이혼을 초래할 수 있다. 성경 안에서 분명히 기록되어 있거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함축성 있게 기록된 이유로 허락된 이혼 후의 재혼은 (당사자들의) 죄와 실패에 대한 충분한 참회가 나타나고 기독교의 결혼의 확고한 목적에 순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나타났을 때에 허락될 수 있다(창 2:18, 말 2:15, 고전 7:2, 9).
제25장 [교회에 관하여]
1.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불가시적이다. 이 교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있어서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모이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시다(엡 1:10, 22­23, 5:23, 27, 32, 골 1:18).
2. 가시적인 교회도 복음 아래 있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이다. 이 교회는 율법시대와 같이 한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하여 참 신앙을 고백하는(고전 1:2, 12:12­13, 시 2:8, 계 7:9, 롬 15:9­12)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손들로 구성된다(고전 7:14, 행 2:39, 겔 16:20­21, 롬 11:16, 창 3:15, 17:7, 갈 3:7, 9, 14, 롬4장).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요(마 13:47, 사 9:7), 하나님의 집이요, 권속이다(엡 2:19, 3:15, 마 12:50, 잠 29:18). 이곳을 떠나서는 구원의 정상적 가능성은 없다(행 2:47).
3. 그리스도는 이 보편적이고 가시적인 교회에게 이들의 모임과 세상 마지막 날까지 이 세상에서 성도의 생을 완수하게 하기 위하여 성직과 예언과 의식을 주셨다. 그리고 자기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자신과 성령이 임재하셔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나타나게 하신다(고전 12:28, 엡 4:11­13, 마 28:19­20, 사 59:21).
4. 이 보편적 교회는 때로는 더 쉽게 볼 수가 있고 때로는 보기가 더 어렵다(롬 11:3­4, 계 12:6, 14, 행 9:31). 이 보편적 교회에 속하는 개체 교회는 복음의 교리를 가르치고 받드는 데 따라 또한 의식이 시행되고 공동 예배를 순수하게 가지고 못 가지는 데 따라 더 순결하기도 하고 덜 순결하기도 하다(계 2­3장, 고전 5:6­7).
5. 지상의 교회는 아무리 순결하다고 해도 혼합과 과오에 사로잡혀 있다(고전 13:12, 계 2­3장, 마 13:24­30, 47). 어떤 교회는 너무나 타락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기보다 사탄의 회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계 18:2, 롬 11:18­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마 16:18, 시 72:17, 102:28, 마 28:19­20)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
6.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의 머리가 되신다. 로마교황은 어떤 의미로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교회 안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와 하나님이라 불리는 모든 자는 적그리스도요 죄인이요 멸망의 아들이다(골 1:18, 엡 1:22, 마 23:8-10, 살후 2:3, 4, 8, 9, 계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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