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연구 경위
제 100회 총회(2015)가 “천주교 영세를 본 교단이 세례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재론을 위한 연구보고서의 결론에 제시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함에 따라 제 89회 총회(2004)와 제 99회 총회(2014)의 결의를 함께 고려하면서 로마(천주)교회의 영세 수용 문제를 집중 연구하였다.
제 89회 총회(2004)는 천주교 영세 교인에 대한 세례를 “영세를 받은 이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입교하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봄”으로 결론 내린 반면, 제 99회 총회(2014)는 “로마교회에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이단집단과 동일시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우리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로 보아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에 입각해서 “영세를 본 교단이 세례로 인정하는 것에 관하여” 재론을 결의하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 연구하여 보고하기로 하였다. 이에 100회 총회(2015)에 제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로마교회 영세를 인정하면 1) 로마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2) 로마교회는 장로교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연구 결론에서 “로마교회의 영세를 인정하느냐 않느냐는 것은 로마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문제다”라고 지적하면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제 89회 총회(2004)의 연구주제는 “임종 및 천주교 영세자 세례에 관한 연구”였고, 제 99회 총회(2014)는 “로마(천주)교회에 대한 연구”였으며, 제 100회 총회(2015)는 다시금 “천주교 영세를 본 교단이 세례로 인정할 것인가에 재론을 위한 연구”였다. 따라서 제 89회 총회의 연구는 “영세”에 관한 것이었고, 99회 총회는 “로마(천주)교회”를 연구주제로, 그리고 제 100회 총회는 다시 “영세”의 문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100회 총회의 연구보고와 결론은 89회 총회와 99회 총회를 종합하면서 영세를 세례로 인정하는 것을 다시 천주교회를 인정하는 문제와 결부시켰던 것이다.
본 연구는 제 100회 총회에 보고된 연구를 재론하는 것이므로 “천주교 영세를 본 교단이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에만 집중하였음을 밝힌다. 비록 연구 가운데에서 “참된 교회”를 거론하게 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초점은 “영세”에 맞추면서 진행하였음을 밝혀둔다.
II. 연구 보고
고대 교회는 여러 차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들, 배교한 자들, 이단들이 베푼 성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가 가장 전면으로 대두된 것은 로마제국의 마지막 박해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이고, 문제를 삼은 자들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 소위 도나투스주의자들이었다. “순수한 교회”를 내세우며 자기들이 베푼 성례만이 참되다고 주장하는 도나투스주의자들로 인해서 교회는 성례가 무엇인가를 심도 깊게 논의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논리에 맞서 “어떤 것을 가지고 가지지 않고의 문제가 다르고 효과 있게 가졌는가의 여부는 다른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De baptismo 4, 17, 24)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만일 성례가 바르게 집전되었다면, 설사 그 성례가 이단과 분파주의자들에게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성례는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성례는 성물, 곧 세례라면 물이고 성찬식이라면 빵과 포도주가 되는데, 여기에 말씀이 가미되는 것이다. “말씀이 성물에 더해지니 성례가 된 것이고, 이것은 보이는 말씀 아니겠는가?”(아우구스티누스, Johannis evangelim tractatus [요한복음 연구], 80, 3)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들과도 세례를 공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성례를 인정한다는 그의 견해가 그 성례의 효력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받아들여지고, 성령께서 그 성례를 효과 있게 만들 때까지 구원에 유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누가 이것을 문제 삼겠는가?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모두 교회 밖에서는 아무런 구원 효과를 갖지 못한다”(아우구스티누스, De baptismo 4, 17, 24). 다시 말하여, 성례의 성립과 성례의 효력을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의 성립과 성례의 효과를 구분하면서, 집행된 성례를 인정하는가의 문제는 성례를 집행한 집단의 정통성 여부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였다. 곧 이단이 집행한 성례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 집단의 정통성을 인정해준다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고대교회의 이 전통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성례의 확립은 성물에 임하는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루터는 성례의 효과는 공교회 안에서만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받는 자의 신앙”에 달렸다고 주장하였기에 성례의 확립과 성례의 효력을 구분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루터의 “성례에서의 신앙 강조”는 개신교가 성례에서 받는 자의 태도와 연결시키면서 인효론(ex opere operante)을 주장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실상 루터의 이러한 해석은 성례를 그것을 받는 이의 신앙에 결부시키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7-29). 즉, 고대교회와 그 전통에 서 있는 종교개혁의 성례 이해는 성례를 집전한 집단의 정통성여부와 성례의 성례됨을 별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칼뱅은 로마(천주)교회의 각종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이 참된 교회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교회를 여전히 교회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들 가운데 세례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날 주께서 파괴된 가운데서도 남아있도록 만드신 교회의 흔적들이 교황주의자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주님은 언약의 증거로서 거기에 세례가 유지되도록 하셨다. 주님 자신의 입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신 것으로서 사람들의 불경건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이 그대로 유지하게 하신 것이다” (칼뱅, 『기독교강요』 4권 2장 11). 칼뱅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루터보다 더 강하게 유지하면서 성례가 있다는 것 때문에 로마(천주)교회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성례 이해와 정반대로 로마(천주)교회의 입장은 고대교회의 성례 이해에서 멀어져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발발하고 나서 이루어진 트리엔트 공의회 23회기에서 로마(천주)교회는 성례와 성직이 상호 결부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제사와 사제직은 하나님께서 두 언약 모두에 존재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 성경은 말하며 공교회가 가르쳐 온 바는 사제직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사도들과 사제직을 가지고 있는 그분의 후계자들에게는 그분의 몸과 피를 성별, 봉헌 집전하는 능력, 그리고 죄를 사하고 정죄하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Philip Schaff(ed.), The Creeds of Christendom II, 186f.) 로마(천주)교회의 성례 이해, 곧 성직이 성례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라는 해석은 그들이 고대교회의 유산에서 단절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바로 이러한 성례 이해가 개신교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된다.
로마(천주)교회의 성례 이해는 그들의 “성직”이해와 직결되며 또한 그들의 딜레마이자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것이 무너지게 되면 교황체제가 붕괴되는 로마(천주)교회의 존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III. 연구 결론
로마(천주)교회가 개신교의 성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직(사제)계급의 전통에 의존하는 그들의 한계요 딜레마이다. 개신교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로마(천주)교회의 일방적이고 왜곡된 성례 이해가 고대교회 전통에 서 있는 우리 개신교회의 성례 이해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들의 영세를 인정하는 것은 성례의 성립과 성례의 효과를 구분한 고대교회의 성례이해의 전통임과 동시에 “만인사제설”을 외치며 탄생한 개신교의 정체성에 걸맞은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로마(천주)교회의 영세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
IV. 참고 문헌
Philip Schaff(ed.), The Creeds of Christendom II, NY: Harper & Brothers, 1919.
아우구스티누스, De Baptismo, (ed.) by Hermann Josef/ Geerlings Wilhelm, Paderborn: Schöningh, 2006
아우구스티누스, Johannis evangelim tractatus CXXIV, Corpus Christianorum SL 36, 1954.
칼뱅, 『기독교강요』 ,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