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몽에 대해서는 본 교단의 제 40회 총회와 41회 총회의 결의 외에 다른 교단에서도 규제하는 결정이 있었다.
1956년 4월 17일부터 22일까지 서울신학대학 강당에서 회집된 성결교의 제 11회 총회가 그렇고 1962년 10월 16일 감리교 총리원에서 모인 연합감리사회의에서도 부흥사를 초빙할 시는 사전에 그 지방 감리사의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이며 나운몽, 백시응씨 등을 초빙하지 못하도록 하되 이를 위반하는 교역자는 심사에 붙이도록 가결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서울노회는 1967년 5월 9일 용문산기도원운동을 불법집단으로 단정했었으며, 1968년 7월 22일 고신 경남노회의 제 38회 제 3차 임시노회도 규제하는 결의를 하였다.
또 예장합동측도 1976년 10월 11일 담화문을 발표하여 제 40회 및 41회 총회의 결의를 재 확인하였다. 한편 대한기독교연합회도 1976년 10월 5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겸손히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기독공보}는 1976년 11월 6일부터 12월 11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용문산기도원 비판'이란 글을 실었다. 1976년 11월 6일자에는 신학적 측면(문상희), 11월 13일자 교회적 측면(김규당), 11월 20일자 역사적 측면(박영관), 11월 27일자 현상학적 측면(탁명환), 12월 4일자에는 노회장의 견해 그리고 12월 11일자에는 전국교회에 드리는 글(임택진)이 실려있다.
나운몽은 용문산기도원(龍門山祈禱院)의 설립자이다. 평북 박천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인생의 근본적 문제 등에 번민하여 여러 학교를 전전하기도 하고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한 때 불교에 귀의, 승려 수도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득도치 못하고 계속 방황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해방 전 경북 소재 용문산에 입산,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다 해방되던 해에는 상경하여 서울 수표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고 그 이듬해 장로 임직을 받았다.
1947년에는 다시 용문산에 입산, 신앙운동은 물론 빈곤퇴치 등의 민중운동도 겸한 애향숙(愛鄕熟)을 설립했다. 이는 한국 개신교 기도원 운동의 모체가 된 것이기도 하다. 6.25 후 본격적인 수도생활에 들어갔고 스스로 은혜를 체험, 입신 방언 신유 예언 진동 등의 신비적 체험을 했다고 한다. 이에 전국 각지로 순회하며 설교를 하고 신유의 은사도 행하는 부흥집회를 주도하였다. 즉 1954년의 양칠년 창립기념대회를 계기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을 시작하였고 이 운동은 점차 수도원적 기도원 운동으로 초점이 맞춰졌고 경건운동이라는 이름도 뒤따르기도 했다.
나운몽의 집회가 시작될 무렵, 문선명의 통일교운동, 박태선의 전도관운동, 노광공의 동방교 등 이단종파운동이 극성을 부렸고 그들 모두 기성교회에서 이탈 신흥종파를 조직했으나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 운동은 기성교회에서 이탈치 않고 집회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용문산기도원의 독립세력이 비대화되면서 기성교회의 예견은 사실로 나타나 마침내 나운몽 장로는 그가 소속되었던 감리교회를 이탈, 일동일교회운동으로 설립된 애향숙산하 교회들을 모두 규합하고 1979년 '대한예수교오순절성결회'라는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
나운몽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는 아니했으나 그가 저술한 많은 저서들을 통해,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그의 사상이 집약된 저서 {기독교도리학}은 그 주장의 이단 여부에 대한 논란이 비등하기도 했다. 여기에다 이런 이단시비에 대하여 1993년에는 {2000년 전통교리에 이상있다}라는 책을 출판하여 '성경으론 정통, 교리로는 이단?'이라는 논리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